연간 1,000만원 가량의 사업비 신청에서 탈락했다. 그래서 급히 어제(2014-3-5) 중구청과 중앙시장 내 신당창작아케이드 운영사무소, 그리고 황학동 주민센터 등을 방문했다.


중구청에서는 그저 예산 더 내놓으라 생떼부리러 오는 줄 알고 바짝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담당자와 팀장을 만나 신당야학 재정 및 공간문제에 대해 상담을 시작하자 마자 하는 얘기, '중구청이 수입이 줄어 지원할 예산이 없습니다'. [서울시 중구]가 돈이 없단다. 없는 건 의지겠지. 서울시 중구가 돈이 없다면 나는 어처구니가 없다. 그래도 그걸로 싸울 필요가 없다. 대책을 마련해야 하니까.


중구청에 요청한 내용은 18시 이후에 이용할 수 있는 강의공간(황학동주민센터, 유락복지관 같은 공공건물의 '강의실') 만이라도 확보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전에는 강의장을 포함한 공간을 확보해야만 한다 생각했으나 지금은 생각을 바꾸었다. 강의실은 학강님들이 학습하는데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최선이지 야학 안에 그 공간을 유지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으로 바꾸게 되었다. 즉 교무실 역할을 하는 공간만 우리 스스로 꾸려가면 되고 강의실은 공공건물의 훌륭한 시설을 이용하자는 것이 요지이다.

다만 이 방법은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가족처럼 한솥밥을 먹던 신당야학의 고유한 문화가 사그라질테니까..


신당야학을 지하로 이전하는 방안까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그래서 만약 지하로 가게 된다면 신당창작아케이드 측에 재능기부 협조를 요청하여 '러브하우스'의 기적을 행할 계획이다. 물론 재료비 등 비용부담은 어떻게든 만들어 봐야겠지만..


황학동주민센터가 리모델링을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주민참여형 주민센터 운영계획을 세우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한 18시 이후의 강의실에 대한 제안을 적극적으로 하려고 한다. 전/현 강학,학강 중에서 황학동 주민도 꽤 많이 있는 것으로 아니까.. 더구나 신당야학도 황학동 주민이다. 법적으로야 아니겠지만 장장 35년을 터를 잡고 이어온 역사가 있는 존재이니까.


위기를 기회로 바꿀 것이다. 낙담하고 포기하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이니..


아래는 전야협카페에 올린 글..


2014년도 성인문해교육 선정결과를 받아 보며..|▣ 자유 게시판
임승택(신당야학) | 조회 71 |추천 0 |2014.02.28. 15:04 http://cafe.daum.net/yahakcom/FLdC/404

신당야학은 이번 선정에서 탈락했습니다.


서울시 중구.. 변두리인데도 월 임대료만 100만원이 넘는 지역인지라 더이상 임대료 부담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곧 지하로 이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진흥원으로부터의 지원도 중단되어버렸네요..


검정고시를 중심으로 그 과정으로만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고,

학습자 수 역시 공간의 협소함으로 인해 꽉 채우면 30명을 조금 넘기는 공간. 그것도 다닥다닥..

힘겹게 공부해 오시던 학강님이 작년 4월에 2명, 8월에 4명이 합격해서 나름 좋은 성과라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물론 지원금만으로 살아남는 것이 비현실적이란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아예 지원을 중단하는 것은 죽으라는 얘기..


심사세부지표는 지자체점수 30점, 문해기관점수 60점, 지역활성화 10점..
신당야학은 객관적이라고 하는 기초 점수에서 탈락이라고 합니다.. 탈락..


선정된 기관들의 지원금액을 보니 소위 '야학'들에 지원되는 금액은 대부분 소액이 많더군요..

지자체직영, 복지관직영 등은 꽤 많은 금액을 받았습니다. 학습자 수 때문인가요?

임대료 부담없이 쾌적한 시설에서 운영하는 기관이 참 부럽습니다..


저희 신당야학.. 4월에 지하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제 그마저도 막막해 집니다.. 그래도 4월 검정고시 시험 때까지는 학강님들께는 알리지 않으렵니다.. 시험이라도 맘편하게 보게 해드려야 할터이니..



그리고 요즘 여기저기 야학에 대해 설명할 때 보여주고 있는 슬라이드.. (첨부파일)

2014년신당야학의진로모색.pdf


0123456789




 

야학운영이 현재처럼 현상유지, 명맥유지로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구성한 정책제안입니다.
3~4시간동안 키보드와 마우스를 괴롭히며 만든 제안문.. 다만 생각은 좀 오래전부터 해오다 게을러서 미루다미루다 이제서야^^

관심있는 분들이 조언을 더 해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만..^^;;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아이들.. 그 방법을 차분히 알려주고 함께 실행해보면 상당히 많은 아이들이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다.

문제아.. 이런말 정말 쓰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문제어른이 훨씬 많다..

주먹질하는 나를 그가 안았다…그때 떠오른 단어, 선생님

[스토리텔링 리포트] '짱'들만 모인 이천 새울학교 중3 연수에게 무슨 일이

기사 이미지

지난 7월 새울학교 천연염색 수업 시간. 바늘 귀에 실을 꿰는 정연수(중3·가명)군의 오른손 마디에 상처가 나 있다. 걸핏하면 싸우고, 분을 삭이지 못하면 벽을 주먹으로 마구 치는 바람에 생긴 상처다. 그러나 정군은 새울학교를 다니면서 마음을 다스려 주먹을 휘두르지 않는 학생이 됐다. [김상선 기자]

경기도 이천시 율면 논밭 한가운데 자리한 새울학교. 중학교 학교폭력 가해학생을 위한 대안학교다. 쉽게 말해 ‘일진’을 모아놓은 곳이다. 이 학교에서 지난 2일 첫 수료식이 열렸다. 올 6월 입학한 18명이 과정을 마쳤다. 중3 정연수(가명)군도 그중 하나. 교무실에서조차 난동을 부리던 정군은 이젠 조용히 앉아 수업을 듣는다. 성적도 올랐다. 주먹을 휘두르는 건 그야말로 옛얘기가 됐다. 무엇이 정군을 바꿔놓았을까. 육성으로 들어봤다.


나는 화가 나면 주먹부터 나갔다. 그 때문에 툭하면 교무실에 불려갔다. 올 5월, 교무실에서 설교를 들을 때였다. 듣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선생이 나를 툭툭 친다. 눈을 치켜뜨자 ‘어디서 노려보느냐’는 호통이 돌아왔다. 분노가 치밀었다. 책상을 발로 차고 손에 잡히는 것을 던졌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주먹으로 벽을 쳤다. 손등에서 피가 흘렀다.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한 달간 집에서 근신 결정. 6월부터는 새울학교란 곳으로 가라고 했다. 집에서도 동의를 했단다.

 6월 1일. 아버지에게 잡혀 새울학교로 끌려왔다. 촌구석 논밭 사이에 알록달록한 3층 건물이 솟아 있다. 이곳에서 몇 달을 보내란다. 입학한 아이들은 42명. 학년별로 15명 정도다. 여학생도 있다. 다들 학교 ‘짱’(주먹이 제일 센 학생)이라고 했다. 서열싸움이 시작됐다. ‘수원의 핵주먹’이라 으스대던 한 남학생은 2학년에게 얻어맞고 4일 만에 짐을 쌌다.

 기숙사 생활은 숨이 막혔다. 오전 7시에 일어나 오전 8시40분부터 오후 4시까지는 수업이다. 다음은 댄스나 연극, 상담 같은 방과후 활동이 이어졌다. 오후 10시30분 잠자리에 들기까지 자유가 없다. 선생들은 퇴근도 안 한다. 기숙사에 살면서 시도 때도 없이 ‘얘기를 하자’고 찾아온다. 풀려나는 건 집에 다녀오는 주말뿐. 창살 없는 감옥이다.

 견디다 못해 이틀 만에 도망쳤다. 걸어도 걸어도 나오는 건 논과 밭. 다시 터덜터덜 학교로 돌아갔다. 몇몇은 이런 생활을 견디다 못해 집과 학교에 사정사정해 돌아갔다. 개교한 지 15일 만에 학생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기사 이미지정군이 부모에게 보낸 편지. 새울학교 입학 초기(왼쪽)에는 “잘 지내겠다” 한 줄뿐이었던 것이 한 달 여 뒤엔 앞·뒷면을 빼곡히 채우게 됐다. 학교는 이상했다. 국어·영어·수학·과학 수업이 1주일에 한 번(2~3시간 집중)밖에 없다. 그것도 교과서 내용을 그대로 배우는 게 아니다. 국어 시간엔 책을 읽고 토론을 하라고 하고 과학 시간엔 토끼를 살펴보라고 했다. 수업 대부분은 예체능이다. 요리나 바느질, 드럼·기타 같은 악기 연주도 가르쳐준다.

 선생들도 희한하다. 수업을 빼먹으면 “다음 시간에 재미있는 것을 보여줄 테니 궁금하면 꼭 들어오라”고 한다. 어느 날 몇몇 친구와 수업을 땡땡이치고 기숙사 뒤편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우리를 찾으러 나온 담임에게 걸렸다. 담임은 “흡연 구역은 저쪽”이라고 알려줬다. 그러더니 “담배를 많이 피우면 키도 안 크고 얼굴도 못생겨져 연애를 못한다”며 “하루에 한 대만 피우라”고 한다. “끊으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도 했다.

수업은 주로 예체능 … 교내엔 흡연구역도

기사 이미지 처음에 나는 여기서도 닥치는 대로 시비를 걸고 싸웠다. 말리는 선생들에게 “꺼지라”고 소리를 질렀다. 한번은 땡땡이치려고 가방을 메고 나가다 교무실 앞 복도에 침을 뱉었다. 하필 교감이 봤다.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일렀다. 그게 왜 그리 고깝게 들리던지. 교무실 문을 걷어찼다. 소리를 지르며 주먹으로 벽을 치는 나에게 선생들이 달려들었다. 맞는 건가. 손등이 따끔거렸다. 선생들이 피가 흐르는 내 손에 약을 바르고 있었다.

 1주일쯤 뒤 이번엔 기숙사 사감과 붙었다. 잠깐 기숙사에 들어가려는데 안 된다고 했다. “기숙사는 정해진 시간에만 문을 연다”는 거였다. 사감실까지 따라가 문을 걷어차고 욕설을 퍼부었다. 주먹을 쥐고 문을 힘껏 때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누가 나를 안고 뒤로 잡아끌었다. 상담 선생이었다. 발버둥치고 욕을 했다. 선생이 내 귀에 속삭였다. “다친 손이 아직 낫지 않았는데 또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모두 문제아라고 손가락질하던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 그게 날 부끄럽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난폭하게 행동했던 내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볼 낯이 없어 수업을 빼먹고 선생님들을 피해 도망 다녔다(정군은 이 무렵부터 머릿속에 ‘선생’ 대신 ‘선생님’이란 단어가 떠오르게 됐다고 했다).

 작은 학교 안에서 피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상담 선생님과 마주 보며 2시간 넘게 대화를 했다. ‘음악과 외국어에 관심이 많음. 평소엔 성격이 온순하고 머리가 좋음. 그러나 화가 나면 참지 못해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고 자해를 함.’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매일 상담하고 관찰한 나의 모습이라고 했다. 이날 선생님과 약속을 했다. 화를 참아보겠다고.

 화가 나면 체육관에 달려가 운동을 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선생님들과 대화를 했다. 화난 이유를 설명하다 보면 ‘별일 아닌데 왜 화가 났을까’ 의문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체육관에 가는 횟수가 줄었다. 마음가짐이 차분해지자 수업에 흥미가 생겼다. 성적이 좋아졌다. 처음 본 쪽지시험보다 20점이 올랐다. 변화를 가장 반긴 사람은 부모님이었다. 나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던 아버지는 주말에 만났을 때 간지럼을 태우며 장난을 걸었다.

 7월 19일 4주간 방학에 들어갔다. 원래 다니던 학교는 1주일 뒤부터 방학이다. 집에 도착한 다음 날 교복을 입고 학교로 갔다. 새울학교 마치면 돌아올 텐데, 사과를 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무실에 들러 ‘죄송하다’고 선생님들께 사과를 했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괴롭힘을 당했던 친구들은 사과를 흔쾌히 받아줬다.

 다시 새울학교에 갔다. 마음이 편해지고, 성적은 더 올랐다. 새울학교에서 성적 통보를 받은 원래 학교 담임 선생님이 전화를 해서는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여기서도 상위권을 노릴 만하다”고 했다.

수료식 때 선생님이 준 편지엔 "널 믿어라”

새울학교 선생님들은 칭찬을 해줬다. “진짜 모습을 찾은 거야. 연수는 원래 머리 좋고 성실한 최고의 학생이었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나는 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내 얘기를 들어주고 믿어주고 내 편이 되어준 선생님들이란 것을.

 지난 2일 수료식이 열렸다. 수료장을 만지작거리는 내게 상담 선생님이 직접 쓴 편지를 건넸다. ‘너 자신을 믿어라. 너는 충분히 멋진 사람이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일부에선 여전히 나를 ‘문제아’라고 생각한다. 한번 새겨진 주홍글씨는 지우기 어렵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내가 ‘문제아’라는 것을 편견으로 만들어보고 싶다.

이천=최모란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최모란.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김상선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com/sskim95/

http://durl.me/5xuvxu

아직 부모는 아니지만 자식으로서 참 많이 감명을 받은 편지.. 실제 편지는 프린트된 종이에 아버지, 어머니의 인감도장도 찍혀있다. 매우 비장^^한 내용이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내용이라 여기 야학카테고리에 올린다.

 

부모가 자식에게 보내는 간절한 편지

 

내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

언젠가 우리가 늙어 약하고 지저분해지거든 인내를 가지고 우리를 이해해 다오.

 

늙어서 우리가 음식을 흘리면서 먹거나 옷을 더럽히고, 옷도 잘 입지 못하게 되면,

네가 어렸을 적 우리가 먹이고 입혔던 그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미안하지만 우리의 모습을 조금만 참고 받아 다오.

 

늙어서 우리가 말을 할 때,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더라도 말하는 중간에 못하게 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면 좋겠다.

네가 어렸을 때 좋아하고 듣고 싶어했던 이야기를 네가 잠이 들 때까지 셀 수 없이  되풀이하면서 들려주지 않았니?

 

훗날에 혹시 우리가 목욕하는 것을 싫어하면 우리를 너무 부끄럽게 하거나 나무라지는 말아다오.

수없이 핑계를 대면서 목욕을 하지 않으려고 도망치던 너를 목욕시키려고 따라다니던 우리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니?

 

혹시 우리가 새로나온 기술을 모르고 무심하거든 전 세계에 연결되어 있는 웹사이트를 통해 그 방법을 우리에게 잘 가르쳐다오.

우리는 네게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는지 아느냐? 상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 버, 옷을 어울리게 잘 입는 법, 너의 권리를 주장하는 방법 등.

 

점점 기억력이 약해진 우리가 무언가를 자주 잊어버리거나 말이 막혀 대화가 잘 안될 때면 기억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좀 내어주지 않겠니?

그래도 혹시 우리가 기억을 못해내더라도 너무 염려하지는 말아 다오. 왜냐하면 그 때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너와의 대화가 아니라 우리가 너와 함께 있다는 것이고, 우리의 말을 들어주는 네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또 우리가 먹기 싫어하거든 우리에게 억지로 먹이려고 하지 말아다오.

언제 먹어야 하는지 혹은 먹지 말아야 하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단다.

 

다리가 힘이 없고 쇠약하여 우리가 잘 걷지 못하게 되거든 지팡이를 짚지 않고도 걷는 것이 위험하지 않게 도와줄 수 있니?

네가 뒤뚱거리며 처음 걸음마를 배울 때 우리가 네게 한 것처럼 네 손을 우리에게 빌려다오.

 

그리고 언젠가 나중에 우리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우리에게 화내지 말아다오

너도 언젠가 우리를 이해하게 될테니 말이다. 노인이 된 우리의 나이는 그냥 단순히 살아온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생존해 있는가를 말하고 있음을 이해해 다오.

비록 우리가 너를 키우면서 많은 실수를 했어도 우리는 부모로서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과 부모로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을 너에게 보여주려고 최선을 다 했다는 것을 언젠가는 너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랑한다. 내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 네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너를 사랑하고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단다.

이 모든 것이 부모의 속임없는 진실한 마음이란다.

 

2012년 8월 25일 15시 30분

아버지 이*석, 어머니 이*희 씀

사실 나는 이 글을 야학史라기 보나는 야학개론이라고 하고 싶다..
야학을 하고 있거나, 또는 하고자 하는 이들이 먼저 알아 두어야 할 필수과정이라고..


한국야학사


한울야학



I. 들어가며


야학은 밤에 열리는 학교(夜學)이며 들에 서있는 학교(野學)이다. 즉 야학은 낮에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을 위해 밤에 수업을 하며, 현실적 제약으로 제도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을 위한 제도 밖의 학교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야학은 단순히 지식을 익히는 배움터만은 아니었다. 일제하에서는 구국운동을, 군사정권 시대에서는 민주화 운동을 위한 전진기지였으며, 사회,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산업화시대에서는 소외된 계층들의 삶의 질을 개선시켜 그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고민의 현장이기도 했다.


100년이 넘는 야학사를 일관된 흐름으로 정리하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야학이 무엇이냐에 대해 보는 사람에 따라 의견이 다르고 그동안 나타난 야학의 형태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다름을 논외로 하고 어떻든 야학이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는 것은 그곳에서 우리 현대사가 격동하는 순간순간마다의 시대적 고민을 돌아보고, 늘 약자였던 기층민중의 안타까운 삶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변화하는 현실에 따라 같이 변화해야하는 야학의 본성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의 야학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깊이 생각하는 계기를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II. 야학이 걸어온 길


1. 우리나라 최초의 야학(1906~1907)


일반적으로 1906년, 함흥에서 농촌계몽운동 일환으로 설립된 농민야학인 보성야학(普成夜學)을 우리나라 최초의 야학으로 본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1907년, 경남 마산에서 설립된 마산노동야학을 최초로 생각하기도 한다. 마산노동야학은 당시 마산의 유지였던 옥기환, 구성전 둘이 돈을 내고 옥기환이 직접 교장이 돼 야학을 운영했으며, 창신학교 교사들이 야학 교사를 맡았으며 여기서 배출된 청년 노동자들은 이후 3·1 독립만세운동의 중추역할을 해냈다.


2. 일제하 민중야학운동(1920-1930년대 말)


2-1 초기단계


1906년에서 1919년에 이르는 시기로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써 근로 민중의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삼았다. 식민지 체제는 수탈을 목적으로 하여 모든 것을 그에 맞게 조직하였고, 교육정책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제하의 공립학교는 일제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교육기관이 된다. 이에 대항하면서 제한적이나마 야학은 민족정신을 교육하고 대변하면서 일제의 침략과 국권 강탈에 대항하여 교육을 통한 세력배양에 주된 힘을 쏟았다. 야학의 장소로는 주로 학교의 교실이나 지방유지 소유의 건물을 많이 빌려 썼고, 경영비도 지방 유지들이 대부분 부담하였다. 이때 세워진 야학은 대략 50여개 소에 달했으며 이것이 다음 단계에서 민중야학운동으로 발전하는 바탕이 되었다.


2-2 발전단계


1920년에서 1930년대 초기에 이르러 야학은 양적 확대는 물론 명확한 현실인식을 갖추고 탄압에 항거하면서 사회운동으로서의 질적 전환을 이룩했다. 3.1운동 이후 지식인들 중에는 노동문제, 농민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들은 나라의 해방과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려면 노동자의 정치적 각성 및 그 운동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사립학교나 서당은 그들의 교육기관으로는 부적합했으므로, 보다 대중적인 교육기관의 창설을 생각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들도 일제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엇보다도 노농대중이 각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를 위해 교육이 시급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어 20년대 야학이 설립되었다.


당시 민중야학은 문맹퇴치에 한정되어 있던 초기단계를 극복하고, 민중의 정치, 경제적 현실 인식과 민중에 의한 반제국주의 투쟁을 목적으로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교육내용이나 교수하는 분위기는 민족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민족의 문제를 걱정하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이 시기의 야학은 제도교육이 식민지 정책의 변화에 따라 단계적으로 투항과 변질을 거쳐 체제유지의 수단으로 전락해 가고 있을 때,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을 위한 교육운동, 사회운동을 통하여 민중의 힘을 결집시켜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데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2-3 쇠퇴기


1930년대 초반에서 1945년 해방 전까지는 일제 당국의 가혹한 탄압을 받아 야학이 해체, 변질, 잠복하는 시기이다. 일본 자본주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세계적인 경제공황과 함께, 활발해진 사회주의 운동의 결과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이 활성화되어 민중야학은 광범위한 민중운동의 기저를 형성하면서, 민중의 의식을 각성시켜 반제국주의 운동전선을 형성하는데 막대한 기여를 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는 민중운동의 기반이었던 민중야학에 대해 예전보다 훨씬 가혹한 탄압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활발하던 민중야학도 192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일제의 탄압을 받기 시작하여, 1930년대에는 전반적으로 그 존립자체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 결과 일제의 방침에 따르기를 거부한 야학은 거의 폐쇄당하거나 지하로 숨어들었고  체제순응적인 야학과 어용야학, 그리고 일제에 투항하다 변절한 야학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 민중야학은 농민운동, 노동운동과도 긴밀한 연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이는 데 함남 흥원의 야학원은 지역농민의 시위가 있고난 후, 그 배후세력으로 지목되어 폐교 당했을 정도로 해당지역 농민운동에 깊이 관여하였고, 1929년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 때, 부산 노동야학 교사들은 배후에서 선언문과 요구문서를 작성해주다가 선동죄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예들은 그 당시 민중야학이 노동운동, 농민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40년대가 되면서 일제는 전시체제에 돌입하게 되었고, <청년훈련소>, <특별훈련성소> 등 강제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야학은 그 기능을 박탈당하게 되었고, 조선어마저 가르치지 못하게 됨으로써 그 민족적 성격을 상실하게 된다.


3. 해방 후~50년대의 야학


3-1 해방 후


해방 후 분단과 동시에 미소냉전체제가 구축되면서 좌, 우익의 이데올로기 투쟁이 극에 달했다. 당시의 교육은 한국도 일본과 같은 적국으로 보는 미군정의 시각과 따라 미국의 자본주의 체계를 심기위한 의도로 미국식 신교육 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에 맞서 1945년 11월에 결성된 전농(전농전국농민조합총연맹)은 전국에 야학을 세우고 일제 청산과 반봉건 운동의 최대 문제인 소작료와 농지 개혁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계몽운동을 폈다. 이는 전농의 좌익계 단체들이 반제국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과 당국의 통제 하에 있지 않은 야학들은 친일부역자를 집행 대리인으로 끌어들여 친일 경향으로 변해가는 미군정의 실정을 비판하며 통일과 일제 잔재 청산을 요구하는 민중 교육 계몽 운동기관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이에 따라 야학은 소작료와 토지개혁, 식량정책, 노동자 자주관리 등을 주장하였으며 친일 교육자 추방 운동도 전개했다.


이렇듯 해방 후 야학이 민중을 계몽하고 현실을 직시하여 삶을 개선하며, 일제 잔재 청산과 미군정의 통치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을 펼친 사실은 일제 하 야학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그 사상과 실천을 계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3-2. 50년대


6.25이후 이승만 정권은 노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교육정책을 펼쳤는데 그 내용은 사상 선도를 목적으로 한 정부 주도의 사회 계몽 운동이었다. 각 대학은 정부의 지시에 따라 농촌 계몽 운동반을 조직, 전국에 파견하여 문맹 퇴치 활동을 벌였다. 또한 법적 제도적 태두리 안에서, 대도시에서 지식 청년과 사회사업가들은 몰락 이농민과 도시 빈민 자제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그들을 교화시킬 목적으로 천막학교가 세워졌다. 이때부터 공민학교의 형태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야학의 명맥은 끊어져버렸다.


4. 60년대


4.19혁명의 좌절을 맞본 지식청년, 학생들의 소박한 실천의지가 일으킨 제2브나로드 운동과 5.16군사정부의 민족재건운동과 만나면서 전국 도시 각지에 재건학교가 만들어지고 빈민봉사활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야학이 확대되었다. 특히 당시 재건야학의 현실적인 목표는 검정고시였는데 현재까지도 검시야학, 고등공민학교, 새마을학교 등의 형태로 잔존하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야학은 단지 경제적 이유로 탈락된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부여한다는 수준이었다. 즉 60년대의 야학은 국민의 학력향상을 위해  단지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었다. 그러나 점차 7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런 야학이 시대를 이해하려는 열의가 가득한 곳으로, 학생들과 같이 열심히 살아가는 곳으로 변모해 가는데 보이지 않는 힘의 바탕이 될 수 있었다.


5. 70년대


70년대 야학은, 해방 후의 공백기를 거쳐 60년대 재건야학의 시대적 한계를 깨닫고, 야학은 역사적 산물이며, 그러므로 시대적 상황에 의해 규정된다는 그 존립 근거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변신을 위해 새로운 각성으로 몸부림쳤다. 그렇다면 70년대 야학이 자기 변신을 위해 몸부림쳤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야학의 존립근거인 시대적 상황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첫째로 경제적인 이유를 들 수 있다. 60년대 경제성장의 견인차는 외자 도입과 수출 증대로, 이는 저곡가, 저임금이라는 민중에 대한 수탈을 기반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또한 남의 나라 돈을 빚내서 하는 경제성장이기 때문에 빚을 갚기 위해 민중들은 과다한 세금까지도 떠맡아야 하는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민중들은 죽어라 일하고도 조금 받고 많이 떼어야 했으며, 이는 마치 인간의 유전인자 속에 가난이라는 인자가 하나 더 생겨 자식에게도 물려줘야만 하는 것처럼 빈익빈 부익부를 고착화시켰다. 농촌에서 이농하는 인구가 해마다 늘었고, 이농한 농민은 도시 변두리의 무허가 판자촌이란 주거형태에 정착하면서 도시의 빈민문제를 야기했다. 70년대 들어 공업화가 급속히 진전됨에 따라, 공장에서는 노동자의 숫자 또한 급격히 증가하였고, 고도성장 정책의 부작용으로 노동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둘째로 교육, 문화적인 요인을 꼽을 수 있다. 모두가 잘 살 수 있다는 화려해보이지만 실제로는 허황된 꿈을 안고 진행된 고도성장정책은, 그 어떤 것보다도 경제적인 부가 최고라는 천민주의적 가치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회는 황금만능주의, 이기주의 등 비인간화로 멍들어갔다. 이의 반영으로 인해 원자화된 대중으로 전락해버린 저소득층은 경제적 성취를 위한 무조건적인 계층 상승을 갈망하게 되었고, 그 구체적 수단으로 교육의 기회를 열망하게 되었다. 이 욕구는 졸업장이 있는 사람은 월급봉투가 더 두텁다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 속에서 더욱 강렬한 것이 되었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주체적 조건이다. 이 요인은 사회의 모순과 이의 반영으로 인한 민중의 왜곡된 욕구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야학의 방향성과 그의 가능성을 강력하게 피력하는 것이다. 70년대 초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이라는 엄청난 충격과 연이은 노동자의 자살 내지 미수 사건, 광주 대단지 수만 명 주민의 폭동사건 등 민중들의 삶의 절규로 이어져 사회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이 시대의 노동문제는 이렇게 극단적이고 폭발적인 양태를 띨 만큼 심각해져 있었고, 이 충격파로 인해 지식인들도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즉 '선 성장 후 분배' 라는 허위의식 속에서의 노동문제의 심각성, 이의 왜곡된 반영과 교육으로 향한 갈망, 노동자들의 주체적인 문제해결 노력과, 지식인들의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 등으로 70년대 야학이 성립되게 되었다.


당시 야학은 그 목적과 교사들의 성격, 운영방식에 따라 검정고시야학(70년대 초반)에서 생활야학(중반), 노동야학(후반), 자취방야학(80년대 초반)으로 발전해 나갔다. 검정고시야학은 자유주의적이고 양심적인 학생들이 주로 인권적인 입장에서 못 배운 노동자들에게 지식을 전달해주는 야학이었다. 이곳에서는 진학준비(검정고시 대비) 학습이 주요한 양태를 띄었으며, 교회 등 주위의 도움을 받아가며 공개적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75년 이후 학생 운동권에서는 단순히 정권 교체를 바라는 자유주의자들이 대거 탈락하고 체제의 변화까지 시도하려는 과학주의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야학 내에서도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과학적 의식으로 무장된 운동가들이 참여하게 되는데, 야학의 성격도 검시야학에서 운동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 노동야학으로 전환되었다.


70년대 야학은 검정고시 야학, 생활야학, 노동야학의 계기적 발전과정이다. 이는 60년대 이래의 고도성장 정책의 부작용이 사회의 표면에 부각, 노골화됨에 따라, 그 문제의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야학의 몸부림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런 몸부림과 자기변신 속에서, 70년대 야학은 노동야학이라는 현실적인 필요성에 부합되는 야학의 형태를 포착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노동교육을 행하기보다는 단지 노동자 대상의 교육에 지나지 않았으며, 노동대중에 대한 이해 결여 및 교사진의 미숙한 경험과 실천력은 흔히 말하는 노동자의 대학생화 라는 문제점을 발생시켜왔다는 지적과 함께, 올바른 개념과 형태 정립은 이루지 못하고 80년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6. 80년대


70년대의 야학이 시대의 필요성에 부합되는 야학의 형태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면, 80년대 야학은 그 형태에 내용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야학협의회>로서, 개체 야학 단위로 준비와 활동이 완결되는 상황은, 개체야학의 역량상 야학의 질적 발전에 있어 한계를 드러낸다는 점과, 개체야학의 고립, 분산적인 활동은 야학의 방향성 정립에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어려움을 가진다는 문제제기 속에서 탄생된 것이다. 이에는 교육연구 분과, 교사훈련 분과, 교과연구 등이 있었고, 이는 전문적인 연구와 야학으로서의 민중교육 이념과 방향 정립 등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야학간의 유기적 연결 관계를 유지하던 야학협의회는 80년 5.17 이후 외부적인 탄압과 자체 내 역량의 부족 등으로 소멸되고 말았다. 비록 짧은 기간의 활동이었으나 <야학협의회>의 의의와 한계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야학협의회>는 이전까지 고립 분산적, 수공업적이던 야학에서 최초로 연합활동 형태를 띤 것으로서 야학론의 정착을 위한 첫 시도였고 야학이 운동성을 갖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실천적 후속작업(교재분과 등)을 해내었다.


둘째, 그렇지만 야학의 성격이나 이념규정에 있어서 미흡했고 방향성이 모호한 협의체 이상의 조직이 아니었다. 즉, 야학의 사회적 역할을 정확히 정리하지 못하여 야학노동자들의 주체적 야학 참여구조 설정이 부족하고, 교사들의 관계 및 진로설정, 야학운영 프로그램에 대한 발전적 대안이 결여되어 기능적인 모임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셋째, 합법공개기구로서의 자기 기반 및 그 재생산, 전체 운동 속에서의 위치규정에 대한 인식(노동운동, 학생운동, 기독운동, 청년운동, 지식인운동 등과의 관계)이 부족하였다. 그 결과 해체과정이 5.17 이후의 탄압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자체 내의 힘의 부재 속에 소멸하는 과정이었다.


넷째, 교회선교 논의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기독 운동적 의의를 가진다. 1980년 5.17 이후 전체 민주화운동은 여러 가지 규제 아래 외면적으로 축소해 가면서 내부적으로 발전적 분화와 함께 사회운동의 방향성과 실천을 둘러싼 논의들이 대립, 갈등이 전개된다. 그리고 야학 역시 심한 외적 규제 속에 양적으로 축소되고 동시에 전체 운동권의 대립, 갈등과 마찬가지의 대립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자체 해산하여 그 수효는 더욱 줄어들지만 야학운동의 근거와 목표, 방향성을 둘러싼 논의와 실험은 더욱 심화되어 간다. 즉, 야학은 외적 규제와 내적 갈등 속에 양적으로 침체하면서 질적인 발전을 해나가게 된다.


한편, 야학의 유형을 살펴볼 때, 이전까지 애매한 관계에 있던 검정고시 야학, 생활야학, 노동야학 등의 교과내용과 운영방식에 따른 외적 구분은 무의미해지고 야학의 목표와 방향성에 따른 질적 구분인 진보적 야학과 보수야학 등의 내적 구분이 의미 있게 된다. 그 분포를 살펴보면, 제도교육 보완기능으로 검정고시학원 성격을 띤 야학들은 대개 큰 규모로 교회부설 청소년학교, 사회사업을 하는 개인이나 단체의 실업학교, 시립근로청소년학교 등으로 유치되는데, 일반 중고교의 산업체 부설학급 증설과 준정규 교육기관 승격 등의 교육제도 개선과정 속에 점차로 설 땅을 잃어 가면서 YMCA 등의 근로자 대상 교육은 검시에서 일반 교양과정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리고 야학의 대중은 보통 대학생 자원교사로 운영되는 교회, 성당, 기타 소규모 장소의 야학들이었는데, 교과는 지역 여건에 따라 검시, 생활, 노동교육 등 다양했으나 그 교육목표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화하였다.


즉, 사회대중 혹은 일반노동자들에 대한 정치적 계몽, 주체적 인간화(의식화)가 목표인가 혹은 노동운동가를 양성하기 위한 소수정예 교육인가, 학내 학생운동의 외부 활동인가 혹은 지역 노동자 속에서 행해지는 독립된 지식청년운동인가, 노동자들 스스로 현장문제를 해결하려는 실천의지와 긍지를 갖게 하는 것인가 혹은 노동조합 등의 현장조직운동을 구체적으로 이루려는 것인가 등의 논점에 따른 견해의 차이로 인하여 분화와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쨌든 이러한 다양한 갈등의 결과, 발전적이고 구체적인 야학 논의가 발생하였고 그 검증을 위한 실험도 쌓여져 나갔다.


1983년 8월경부터 전체 야학 중에 주류를 이루고 있던 사회운동 성향의 야학들의 대학생교사들이 치안본부에 강제 연행되어 수사를 받아 이루어진 사건이 야학협의회사건이다. 야학연합이란 야학협의회가 소멸된 후, 개별적 고립 분산적으로 활동해 오던 야학간의 연대필요성이 논의 되면서 구성이 시도되었으나, 초기 조직화가 채 이루어지기 전에 방대한 범죄조직인양 꼬리표를 달고 드러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야학은 사회주의 교육기관으로서, 교사는 사회주의자로 매도당하게 되었고, 교사뿐만 아니라 학생까지도 연행당하는 등 대대적인 야학 탄압이 있게 되었다. 이후 야학운동을 위기에서 구출하기 위한 방향을 놓고 학생 운동적 인상에서 보는 야학의 자체 소멸까지 각오한 투쟁으로 정치 문제화시키자는 주장과 노동 운동적 입장에서 보는 야학의 복구, 확대를 통해 공개대중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상당히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러나 결국 야학의 존재론적 필요성은 나름대로의 정립을 거치면서 일상적 탄압을 공개폭로전에 의해 중지시킨 채 새롭게 청년운동 차원에서 야학의 복구, 확대를 이루어내게 된다.


7. 90년대


90년대의 야학은 80년대의 정신적 유산을 지키고 나아갈 것인지, 변화하는 현실을 바로 보고 새로운 형태를 야학을 창조 할 것인가의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90년대 초반, 노동야학은 80년대의 정신적 유산(진보적 야학)을 어떻게 지키면서 새로운 야학을 모색 할 것인가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90년대 중, 후반기로 들어서면서 이러한 진보적 야학에 대한 논의가 현실 속에서 불가능이라고 판단하고 다른 형태의 야학을 고민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반면에 검시야학은 노동자 대투쟁 이후 검시야학의 한계를 느끼면서 무엇인가를 담아보자는 노력을 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물론 이러한 노력에도 90년대 중반이후 대부분은 검시야학화 된다. 여전히 야학은 소멸과 생성을 하게 되는데, 야학의 설립이 자유로워지진 87년 이후로 새롭게 야학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90년대에 들어 야학은 수요층 면에서 여러 가지 큰 변화를 보인다.


첫째는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주부들의 큰 증가이다. 이로 인해 야학은 더욱 보수적인 검시야학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주부를 대상으로 사업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낮 시간에 주부만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 개설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는 90년대 후반, 다양화된 연령에 따른 야학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낳게 되었다. 10대의 어린 청소년에서부터 50대의 여성까지 한 공간에 있다면 각자의 문화, 삶의 방식, 교육과 학습의 이해 정도, 추구하는 목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환경은 학생들을 힘들게 만들 수도 있고, 교사들은 도대체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지에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둘째는 비문해자의 등장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비문해자가 상당수 존재한다는 사실은 기억 속에서 잊혀 갔다. 그런데 90년대를 넘어서면서 다양한 한글 교육기관들이 그동안의 비문해자의 연구와 조사, 자료를 비웃듯 생겨났다. 1999년, 서울에만도 약 67개의 한글 교실이 만들어졌다. 야학에서도 80년대까지만 해도 중, 고등과정의 교육과정을 설치하면서 한글교육과정은 개설을 하지 않았지만, 90년대를 넘어서면서 한글과정이 개설이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한글 교실은 야학의 전망과 관련되어 깊이 있게 논의되었다.


셋째는 장애인의 등장이다. 한국에서 그동안 장애인이란 교육은커녕 외출의 기회조차 갖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최초의 장애인 야학으로 81년, 인천 작은자 야학이 개설된 이래 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장애인 야학들이 생겨났다. 옥수, 빛나리야학 같이 기존 야학에서 장애인야학으로 전환한 경우도 생겨났다. 장애인야학의 경우 정신장애보다는 지제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정신장애에 대한 특수교육의 경우 시설이나 교육, 강사의 전문성이 더 요구되는 현실에서 야학이 택할 수 있는 영세적인 조건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장애인 야학들의 설립은 기존에 장애인들의 교육문제가 도외시되어 반 정도의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인 현실에서 나타난 현상들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의 경우, 이동권 문제, 취업 문제, 취업하더라도 비장애인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임금 문제 등 인권문제도 교육 문제만큼 중요한 현실에서 장애인야학의 활동이 이들을 인권 보장을 위한 사회적 운동차원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엿보인다.


90년대는 교사의 성격 면에서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야학의 교사들은 대개 대학생으로 구성되게 마련이다. 90년대 초반에만 해도 교사들의 입에서는 ‘운동’이라는 말이 자주 나왔고, ‘야학운동’을 어떻게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교사들이 날밤을 새워 토론하고 술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중반을 넘기면서 야학 교사의 대부분을 봉사 활동의 일환으로 여기는 대학생으로 채워졌다. 다시 말하면 90년대 전반의 야학교사는 사회적 문제와 맞물려 이념으로 무장하고, 신념과 헌신성으로 공동의 문제를 풀기 위해 야학활동에 참여한 반면, 90년 후반은 개인적 경험의 확대를 참여의 성격으로 야학 활동을 하는 경향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로 야학의 고민은 증가하고 활동 영역은 위축되는 상황에서 95년, 통합이라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야학이 등장했다. 서울 광진구에 있던 20년의 역사를 가진 청송야학과 한겨레야학이 새날(새날을 여는 지역교육센터)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된 것이다. 이는 200m의 거리에 있던 두 야학 교사들에게 유대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새날은 통합된 역량을 이용해 약 50여 평으로 공간을 넓힌 동시에 이 공간을 활용, 중, 고등과정, 주간에 운영되는 주부대상의 한문, 영어 교실, 한 달에 한 번 지역주민을 위한 교양 강좌, 소모임으로 이루어지는 영화, 독서토론, 풍물패, 서예모임, 등산반, 여성모임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III. 나오면서


2000년대 들어 90년대에 시작된 야학의 변화는 더욱 심해졌고 특히 교육 여건의 변화로 야학에서 청소년을 찾기 어려워졌다. IMF로 인해 개인들의 후원금은 줄어들고 야학에서 청소년이 없어지자 정부의 지원금은 없어져 많은 야학들이 재정적인 곤란을 겪다 많은 야학이 사라졌다. 살아남은 야학도 재정적 어려움은 겪는 건 마찬가지이며 학생은 급감하고 구성원도 대부분 장, 노년의 여성으로 그 성격이 크게 달라졌다. 또한 졸업 후 갈수록 어려워지는 취업을 준비하느라 대학생들의 야학 교사 지원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런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한 방법으로 야학 간 연대를 선택, 2000년  <전국야학협의회>가 발족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전국 야학의 연합 조직이거나 참가한 야학에도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조직이라 보기 어렵다.


그래서 누구는 야학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고, 다른 누구는 변신을 통해서라도 야학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고민하고, 또 지극히 소수지만 누구는 야학의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힘든 과정을 감수하고 있다. 이중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는 결국 각자의 몫이 될 것이다.



● 참고자료: 야학의 분류


오랫동안 야학은 검정고시 야학, 생활 야학, 노동 야학의 세 가지로 분류되어 왔다. 오늘날에는 무의미한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의미가 있는 내용이 남아 있고, 또 야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한 장면이었기에 참고 자료로 싣는다.


1)검정고시 야학


검정고시의 원류는 61년 관(官)주도의 재건야학에서 볼 수 있었다. '선 성장 후 분배'라는 모순에서 출발한 경제개발계획은, 정규학교에서 소외된 도시의 노동청소년들을 낳게 되었는데, 이들이 검정고시야학의 대상이었다. 검정고시는 배우지 못한 것이 항상 한스럽고, 사회에서 공돌이, 공순이, 불량배, 깡패 등으로 손가락질 받는 노동자나 빈민 자제에게 학교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와 검정고시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열심히 공부해서 검정고시에 붙으면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나갈 수 있으리라는 생활의 기쁨과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또한 검정고시 야학은 사회로부터 당하는 서러움과 실의, 좌절 속에서 구겨지고 주눅이 들어 사회 속의 무능력한 개인으로 남는 것을 방지하여, 사회적 모순을 완화하는 데도 한 의의를 가졌다. 그러나 실제로 검시야학의 교육과정 속에서 노동자들이 감수해야 하는 심리적 고통, 저조한 검시합격률, 중도탈락률 그리고 야학에 나오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경제적 손실, 건강의 파괴 등은 대학생과 노동자의 열성 및 노력에 비한다면 너무도 비참한 것이다. 교육을 통한 계층상승의 기회는 그것이 사회의 경제적 불평들 위에 성립하는 이상 결코 평등교육의 원리를 실현시킬 수 없다는 객관적 현실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검시야학에서는 야학의 학생이 이러한 객관적 현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오히려 사회적 신화에 근거하여 자신을 재평가하게 된다. 즉 자신이 검시에 떨어진 이유를 돈이 없어서 검시학원에 못 나갔기 때문에 또는 자기가 실력이 없어서, 열심히 안 해서 떨어졌다고만 생각한다.


한편 검시야학에 나오는 대학생들이 교사로 성립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 그들이 남달리 봉사의식이 강하고 성실하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바로 야학과 관련된 대학생의 존재적 보수성, 즉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있다든지, 제도 교육 하에서 성공한 자들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베풀 수 있는 위치에 있다든지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검시야학 교사들의 분위기는 제도교육 교사들의 분위기와 유사한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교무실 문에 '학생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교무실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문구를 붙여놓고 카드놀이를 즐긴다든지 하는 경우도 쉽게 발견될 수 있으며, 제도교육의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를 야학의 적용시키려고 하는 사고방식 및 행동유형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검시야학의 학생들은 그 어느 집단보다도 야학에 머무르는 한은 진지하고 열성적이다. 그들은 보통 2,3년 배움에 굶주린 상태에서 야학에 들어오게 되므로 더욱 열심인데, 배운다는 것 자체가 왜곡된 사회로부터 강요받는 노동자라는 열등의식을 잠시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주기 때문이었다.


2) 생활야학


검정고시 야학이 비현실적인 목적과 상황 인식의 부족 등 문제를 드러내고 있을 때,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 산동네 판자촌의 철거문제는 경직된 검정고시 야학에 반기를 들고, 좀 더 실제적이고 생활을 통한 다양한 전인교육으로서의 생활야학이란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여기서는 주로 꽃꽃이, 붓글씨, 한문 등을 가르친다. 그러나 생활야학은 내용도 아주 다양하고 사상성도 보수에서 진보까지 아주 넓게 퍼져 하나의 확실한 형태를 설명하기도 힘들고, 개념 또한 정의내리기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검정고시 야학과 노동야학의 중간, 또는 검정고시 야학이 넘어가기 쉬운 과도기적 형태 등 애매모호한 개념 정의가 많이 사용되나, 아직 미정립 상태이다.


3)노동야학


검정고시 야학과는 달리 상급학교 진학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노동야학은 60년대 이후 사회적 불평등 현상의 심화, 노동조건의 열악화란 상황과, 학생, 기독교계 등의 민중에 대한 자각이 결합하여 생겨난 것이다. 즉 노동야학은 검정고시 야학의 시대적 한계를 깨달으면서,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역사 속에서 새로이 창출된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야학은 기업가에 의해 심어진 현실의 환상을 깨고 자신에 대해 긍지를 가지며, 스스로의 인간적인 삶을 위해 주체적인 권리를 찾고자 하는 의식으로 변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노동야학은 시대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제 해결을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전체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역사의 진보와 발전의 기초는 생산에 있으며, 그 생산에 있으며, 그 생산의 직접적인 담당자인 노동 대중이야말로 사회의 주인공이라는, 노동자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 기초한 과학적 이론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야학은 시대의 필요성이라는 현실적 여건과, 과학적 타당성을 지닌 이론적 여건이 부합되는 현장이었다. 하지만 노동야학은 학생들의 열성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한계에 부딪혔다.


첫째, 노동야학을 주도해 온 교사들의 한계가 심각했다. 교사들은 주로2-3학년이 주축이었는데 이들은 야학운동 경험이 부족했고 현장 활동 경험 및 투쟁경험이 전혀 없었으며, 과연 노동운동이 혁명운동의 주체인가를 확인 하려고 야학운동에 참여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현장 활동에 대한 지도를 전혀 할 수가 없었으며, 현장문제 해결을 전적으로 노동자들에게 맡겨버렸다. 하지만 노동자들도 투쟁경험이 전무하고 투쟁방식도 거의 모르고 있었으므로, 결국 그토록 열망하던 현장문제의 노동운동으로서의 발전은 완전히 방치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에 따라 힘들어 쌓아놓은 의식화 교육은 무용지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둘째, 야학자체가 여러 공장 노동자들은 묶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현장감이 결여되었고 현장투쟁을 위한 구체적인 논의가 집단적으로 이어지지도 못하였다. 이리하여 야학에서는 점차 현장문제에 대한 논의가 사라지고 현장 활동의 도피처가 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현장문제를 연구하지 않은 운동권학생들이 운영하는 노동야학의 운명은 서클주의로의 전락이었다. 이 때문에 결국 노동야학은 점차 소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