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저들 검찰과 기득권은 '법'으로 어떻게든 똥칠을 해서 개혁을 무력화시키려고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한가지의 목표.

영화에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어빙은 유태인 역사학자 데보라 립스타트를 영국법정에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 영국법률은 재미있게도 피고소인이 명예훼손이 아닌 것을 '법'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립스타트의 변호인은 한사코 홀로코스트 피해자와 피고소인 본인도 법정 증인으로 세우지 않는 전략을 택한다.
이유는 매우 단호하고 단순하다. 어빙의 거짓말을 '법'에 타당한 증거로써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영화를 한 번 보시길 권한다. 매우 침착한 변호인과 상대방의 선동에 잘 넘어가 버리거나 감정적으로 휘둘리는 피고소인의 차이를 잘 살펴보시길..

법은 그 권위와 신뢰성이 어찌되었건 '객관적인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만약 조국 전장관 일가족의 티끌만큼의 유죄판결을 받아낸다면 조중동을 비롯한, 심지어 한경오까지 갖가지 기레기들이 떨쳐 일어날 것이란 생각이다. 논평이랍시고 자유당, 미래당, 평화당은 신나서 떠들어 제낄거고 기레기들은 검증도 없이 그냥 따라쓰겠지..
심지어 정의당까지도 한통속이 될 것 같다는 암울한 예측을 하게 된다..

지금.. 저들의 모든 법적인 시도를 무력화시켜야 검찰개혁이라는 간절한 소망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다. 공수처법이 처리되기 전까지는 우리는 아직 고담시티에 있다는 것을, 악인은 시민속에 있지 않고 권력속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4784

김복동 할머니 일대기.."절규하며 죽었다"

South Korean campaigner Kim Bok-dong has died at the age of 92
한국의 활동가 김복동 할머니가 향년 92세로 세상을 뜨셨다
The coffin passed the Japanese embassy in Seoul, accompanied on its final journey by mourners waving banners and holding yellow butterflies.
할머니의 관은 서울에 주재한 일본 대사관 앞을 지나갔으며, 이 마지막 행렬에는 많은 조문객들이 현수막과 노란 나비들을 들고 함께했다.
Cries of “Japan must apologise” rang out above the crowd, while others quietly sobbed.
“일본은 사과해야 한다”라는 울부짖음이 군중들 위로 크게 울리기도 했고 또 다른 이들은 조용히 훌쩍였다.
It was not your usual funeral procession. But then, Kim Bok-dong was not your usual woman, and this was her final act of resistance against a country which had stolen so much from her.
이것은 일반적인 장례 행렬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복동 할머니는 일반적인 여성이 아니었고 이 장례 행렬은 그녀로부터 많은 것을 훔쳐간 한 국가에 저항하는 이분의 마지막 행동이었다.
Kim was one of thousands of so-called “comfort women” rounded up by the Japanese army and forced to work as sex slaves for years on end.
김 할머니는 일본군에 의해 붙잡혀 수년간 강제 성노예로 일하게 된 수천 명의 일명 “위안부” 여성들 중 한 명이었다.
She died on Monday, at the age of 92, without ever receiving the apology she wanted; still railing against the injustice; still angry with Japan for taking the life she could and should have had.
그녀는 그토록 원했던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월요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여전히 불의에 맞서 싸우며, 그녀가 누릴 수도 있었던, 누렸어야 마땅한 자신의 삶을 낚아챈 일본에 대해 여전히 분노한 채로 말이다.
“I was born a woman,” she said, “but I never lived as a woman.”
“나는 여성으로 태어났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나는 여성으로서 살아 본 적이 없다.”

I had to comply’
‘나는 복종해야 했다’
It took Kim Bok-dong almost 40 years to find the strength to tell her story.
김복동 할머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용기를 내기까지 거의 40년의 세월이 걸렸다. She was just 14 when the Japanese soldiers arrived at her family’s home in Yangsan, South Gyeongsang. They said she was needed to work in a factory. If she did not come, they warned her mother, the family would suffer.
할머니가 고작 14세였을 때, 일본군은 경상남도 양산에 있는 할머니 가족이 살던 집에 쳐들어왔다. 그들은 할머니가 공장에서 일하는 데 필요하다고 말했다. 만일 할머니가 따라오지 않으면 가족들이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할머니의 어머니에게 경고했다.
But Kim was not taken to work in a factory. Instead, the teenager found herself transported to one of hundreds of “comfort stations” set up by the Japanese Imperial Army across the territory it had seized.
그러나 김 할머니는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징집된 것이 아니었다. 그 대신 이 십대 소녀는 일본제국 군대가 점령한 영토 전반에 걸쳐 설치된 수백 개의 “위안소” 중 한 곳으로 실려가게 되었다.

These “stations” were, in reality, brothels where some estimate as many as 200,000 women were forced to work as sex slaves.
사실 이 “위안소”들은 추정상 약 20만 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강제 성노예로 일하도록 만들어진 매춘굴이었다.
Kim, who should still have been in school, was among them.
아직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의 김 할머니는 그들 중 하나였다.
Her young age did not go unnoticed after she arrived in China.
중국에 도착한 후 그녀가 어리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When they found out I was only 14, they talked among themselves saying ‘Isn’t she too young?’,” she told YouTube channel Asian Boss during an interview in October 2018.
“내가 14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차렸을 때, 그들은 자신들끼리 말하길 ‘이 여자 아이는 너무 어리지 않나?’라고 했다”고 김 할머니는 유튜브 채널인 아시안 보스와의 인터뷰에서 2018년 10월 말했다. Apparently, it was not a problem. She was sent to start work.
그것이 문제가 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성노예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The first time, I got dragged into one of the rooms and beaten up a bit,” she recalled. “So I had to comply.”
“처음에 나는 여러 방들 중 한 방으로 끌려들어가 두드려 맞았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그래서 나는 복종해야만 했다.”
Afterwards, she said, the bed sheets were covered in blood. It was too much to bear, and she decided there was only one way out.
이후, 그녀는 말하길, 침대 시트는 피범벅이 되었다. 그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고, 그녀는 그곳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뿐이라고 믿었다.

Using the little money she had been given by her mother, she and two others convinced a cleaner to buy them a bottle of the strongest alcohol they could find.
어머니가 주신 얼마 안 되는 돈으로 그녀와 두 명의 다른 여성들은 청소부를 설득하여 구할 수 있는 가장 독한 술 한 병을 샀다.
They drank until they passed out, but it wasn’t enough. The three girls were found, and their stomachs were pumped.
그들은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셨으나 그것은 충분하지 않았다. 세 명의 소녀들은 발견된 뒤 위 세척을 받았다.
When Kim finally woke up, she made a choice – no matter what happened, she would live to tell the tale.
마침내 깨어났을 때 김 할머니는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 이 이야기를 알려야겠다고.
‘How could I tell anyone?’
“어떻게 남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The Japanese Imperial Army first introduced the idea of “comfort stations” in the early 1930s. It was supposed to stop their soldiers going on “raping sprees”, and keep them free of sexually transmitted diseases
제국주의 일본군은 1930년대 초 “위안소”의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이는 일본군이 “무분별하게 강간하는 것”을 방지하고 성병을 옮기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In the beginning, it is thought they used prostitutes. But as Japan’s military grew, so did demand. Eventually, they turned to slavery.

초기에 일본군은 창녀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 군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수요도 늘었다. 결국 그들은 노예를 찾고자 했다.
The men, Kim Bok-dong later recalled, would line up outside, waiting their turn.
후에 김복동 할머니는 남자들이 밖에서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고 기억했다.
Weekends were particularly dreadful. On Saturdays, she would work for six hours, the men arriving one after the other. On Sundays, it was nine hours.
특히 주말은 끔찍했다. 토요일이면 김복동 할머니는 6시간을 일해야 했고 남자들은 쉬지 않고 들어왔다. 일요일에는 9시간이었다.
Sometimes she would see almost 50 men in a day. Some days, she lost count. By the time her “shift” ended, she could barely stand up or walk.
어느 때는 하루에 거의 50명 가량을 상대해야 했다. 어느 날은 수를 세다가 잊어버리기도 했다. 하루의 “근무시간”이 끝날 때면 할머니는 거의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했다.
Kim was moved from station to station, and in 1945 she found herself in Singapore. The Japanese began to move Kim and the other comfort women out of the brothels. Kim found herself working as a nurse, still waiting for rescue.
김 할머니는 여러 위안소를 전전했고 1945년에는 싱가포르에 있었다. 일본군은 김 할머니와 다른 위안부 여성들을 위안소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김 할머니는 간호사로 일하며 구조되기를 기다렸다.

After first telling her story in 1992, she became a dedicated justice campaigner
1992년 처음 자신의 이야기를 한 후로 김 할머니는 열성적인 정의 활동가가 되었다.
It was 1947 when she was finally brought home to South Korea. She didn’t know how long she had been gone; she also didn’t know how to find the words to explain what had happened to her.
김복동 할머니가 마침내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1947년이었다. 김 할머니는 자신이 얼마 동안 떠나 있었는지 알지 못했고 또한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How could I have told them about my experiences?” she asked. “I had things done to me that were unfathomable.”
그녀는 “내가 경험한 것들을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나?”라고 물으며,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많은 일을 겪었다”고 말했다.
She wasn’t alone in her silence, as the University of Connecticut’s Alexis Dudden explains.
커네티컷 대학의 알렉시스 더든 교수가 설명하듯 할머니는 침묵을 지켰던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다.
“I think her history following her return to Korea is a really good explanation of the double victimization of those who survived,” the history professor said. “There was not space in this society for the women to go public.”
더든 역사학 교수는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 할머니에게 있었던 일은 생존한 위안부들이 겪어야 했던 이중 희생화의 좋은 설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이 사회에서 그 여성들이 대중 앞에 나설 곳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Kim did find her voice though, a few years after her return. Her mother wanted her to marry, and she felt she had to explain why she would not.
하지만 김복동 할머니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귀국한 후 몇 년이 지나서였다. 어머니는 그녀가 결혼하기를 원했고, 할머니는 자신이 왜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하는지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I confessed that, given all the abuse done to my body, I didn’t want to screw up another man’s life,” she told Asian Boss.
김복동 할머니는 “내 몸에 가해진 온갖 학대를 생각하면 다른 남자의 인생을 꼬이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다”고 아시안 보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Her mother, she said, became distressed. Unable to share her daughter’s secret, she died shortly afterwards of a heart attack. Kim believed it was the pain of the secret which killed her.
김복동 할머니는 어머니가 많이 괴로워했다고 말했다. 딸의 비밀을 감당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김 할머니는 어머니를 죽인 것은 바로 그 비밀의 고통이었다고 믿었다.

‘It’s not about money’
“돈이 문제가 아니다”

It would take decades for Kim Bok-dong to talk again about what happened to her. She moved to Busan, where she ran a successful fish restaurant.
김복동 할머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기 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김 할머니는 부산으로 옮겨가 생선 음식점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And then Kim Hak-sun came forward, sharing her own story of being imprisoned as a “comfort woman” by the Japanese in China – the first South Korean victim to break her silence so publicly. It was 1991. By March 1992, Kim Bok-dong had come forward to tell the world her account.
그러던 중 김학선 할머니가 중국에서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로 붙잡혀 있었던 본인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말했다. 김학선 할머니는 침묵을 깨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최초의 한국인 피해자였다. 그게 1991년이었다. 1992년 3월, 김복동 할머니는 앞으로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다.
“She had incredible strength – she was a survivor,” says Prof Dudden, who first met her more than two decades ago. “She came forward to tell her truth. That is when she makes her mark on the page.”
20여 년 전 김복동 할머니를 처음 만난 더든 교수는 “김 할머니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생존자였다”며, “김 할머니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 때가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Her story would not just impact her fellow survivors in South Korea, though. It would bring together survivors from around the world – including women in Vietnam who had been attacked by South Korean soldiers during the US war. In 2014, she set up The Butterfly Fund to support fellow victims.
하지만 할머니의 이야기가 한국에 있는 동료 생존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 각지의 생존자들을 결집하게 했으며 그 중에는 미국과의 전쟁 중에 한국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던 베트남 여성들도 포함되었다. 2014년 김복동 할머니는 동료 희생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나비재단을 설립했다.
“The survivors of sexual violence in conflict from the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and Uganda, address Kim Bok-dong… as ‘our hero’, ‘our mama’, and ‘our hope’,” a spokesman for The Korean Council for Justice and Remembrance for the Issues of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recalls.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대변인은 “콩고민주공화국과 우간다에서 분쟁 중 성폭력을 당한 피해생존자들은 김복동 할머니를… ‘우리의 영웅’, ‘우리의 엄마’, ‘우리의 희망’이라고 부른다”고 회상한다.

Kim did not just share her story. When she had money, she gave it. In 2015, she started a scholarship for children in conflict regions with her own money. The fact her own education had been cut so short was a regret until the end of her life. When it became clear she was dying of cancer in 2018, she began to give away what little money remained.
김복동 할머니는 단순히 자신의 이야기를 알린 것만은 아니었다. 김 할머니는 돈이 있으면 이를 나누었다. 2015년 김 할머니는 자신의 돈으로 분쟁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장학금 지급을 시작했다. 이른 나이에 교육을 중단한 것이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할머니에게 후회로 남았다. 2018년 암으로 죽을 것이 확실해지자, 할머니는 남아 있는 약간의 돈마저도 기부하기 시작했다.
But through all this – speaking around the world, campaigning outside the Japanese embassy every Wednesday – she still did not get the apology she felt she and the other victims deserved.
그러나 이런 모든 일들, 즉 전세계에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캠페인을 벌이는 모든 행동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자신과 다른 희생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사과를 아직 받아내지 못했다.
She was derisive of the 2015 deal between the Japanese and South Korea, which saw her former captors pay 1bn yen ($8.3m, £5.6m) to fund victims.
김 할머니는 자신의 납치범들이 피해자들에게 10억 엔(830만 달러, 560만 유로)을 지불하도록 한 2015년 한일 협정을 비웃었다.
What Kim wanted – what she was fighting for – was a full admission of guilt. Some still allege the women were not forced to work in the stations.
김복동 할머니가 원했던 것, 할머니가 이제껏 싸워온 것은 상대가 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 여성들이 매춘소에서 일하도록 강요 받은 것이 아니라고 아직도 주장한다.
“We won’t accept it even if Japan gives 10bn yen. It’s not about money. They’re still saying we went there because we wanted to,” Kim told lawmakers in 2016.
2016년 김복동 할머니는 국회의원들에게 “우리는 일본이 100억 엔을 준다 해도 받지 않을 것이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그곳에 가고 싶어해서 갔다고 아직도 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South Korea’s President Moon Jae-In has since said he will renegotiate the fund, focusing more on the victims.
문재인대통령은 그 이후 희생자들을 보다 초점을 맞춰 그 기금을 재협상할 것이라고 밝혔다.
But it came too late for Kim. As she lay taking her final breaths, she expressed “strong anger” towards Japan, her friend Yoon Mee-Hyang told reporters. As Prof Dudden puts it, she “died screaming”.
그러나 김복동 할머니에게는 너무 늦었다. 윤미향 씨는 기자들에게 할머니는 병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며 일본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현했다고 말했다. 더빈 교수의 말처럼 김복동 할머니는 “절규하며 죽었다.”
But her legacy will not be lost. In among the crowd at her funeral was Kim Sam, 27, who first met Kim “sitting up straight even in the rain as she spoke about her struggle”.
하지만 김복동 할머니의 유산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장례식에 참석한 군중들 중에 27세의 김삼 씨는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할머님은 투쟁에 대해 말할 때 빗속에서조차도 자세를 똑바로 하고 앉으셨다”고 말했다. “Upright, dignified – that’s how she always was, first as a victim and later as a human rights activist,” she recalled.
“고결하고 품위 있게, 김복동 할머님은 늘 그러셨다. 처음에는 희생자로서, 나중에는 인권운동가로서”라고 그녀는 회상했다.

“She’s a role model I respect the most.”
“할머님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롤모델이시다.”

(뉴스프로의 번역입니다)​

'영국 기자가 본 대한민국' 이라는 글입니다...
출처? 모름.. 근데 읽다 보면 영국기자가 썼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민족주의 성향임.. 힐링용^^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희대의 정치 코미디를 바라 보면서 분노를 뛰어 넘는 서글픔을 느끼는 이 때, 이 글로 인하여 조금이나마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케 되고 눈물이 나도록 애국심을 끓어 오르게 해 주네요...

영국 기자가 본 대한민국

한국에서 15년간 기자생활을 한 영국의 '마이클 브린'이 쓴 "한국인을 말한다"...에서 한국인은 부패, 조급성, 당파성 등 문제가 많으면서도 ... 또한 훌륭한 점이 정말 많다!라고 표현하면서...

1. 평균 IQ 105를 넘는 유일한 나라.

2. 일 하는 시간 세계 2위, 평균노는 시간 세계 3위인 잠 없는 나라.

4. 문맹률1%미만인 유일한 나라.

5. 미국과 제대로 전쟁 했을 때 3일 이상 버틸 수 있는 8개국 중 하나인 나라.

6.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며 아직도 휴전 중인 나라.

7. 노약자 보호석이 있는 5개국 중 하나인 나라.

8. 세계 2위 경제대국 일본을 발톱사이의 때만큼도 안 여기는나라.

9. 여성부가 존재하는 유일한 나라.

10. 음악 수준이 가장 빠르게 발전한 나라.

11. 지하철 평가 세계1위로 청결함과 편리함 최고인 나라.

12. 세계 봉사국 순위 4위인 나라.

13. 문자 없는 나라들에게 UN이 제공한 문자는 한글이다.
(현재 세계 3개 국가가 국어로 삼고 있음.)

14. 가장 단기간에 IMF 극복해 세계를 경악시킨 나라.

15. 유럽 통계 세계 여자 미모순위 1위인 대한민국.

16. 미국 여자 프로골프 상위100명 중 30명이나 들어간 나라.

17. 세계 10대 거대 도시 중 한 도시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서울)

18. 세계 4대 강국을 우습게 아는 배짱 있는 나라.

19. 인터넷,TV, 초고속 통신망이 세계에서 최고인 나라.

20.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를 가진 나라. (한글 24개 문자 11,000 의 소리를 표현가능, 일본은 300개, 중국은400개에 불과)

21. 세계 각국 유수대학의 우등생 자리를 휩쓸고 있는 나라. (2위 이스라엘. 3위 독일)

22. 한국인은 유태인을 게으름뱅이로 보이게 하는 유일한 민족. 까칠하고 비판적이며 전문가 뺨치는 정보력으로 무장한 한국인. 광우병시위 때 거의 전국민이 전문가였음.

23. 세계에서 가장 기가 센민족. 한국인은 강한 사람에게 꼭 "놈"자를 붙인다. '미국놈, 왜놈, 떼놈,러시아놈'....등 무의식적으로 "놈"자를 붙여 깔보는게 습관이 됐다.

24. 약소국에겐 관대. '아프리카 사람, 인도네시아 사람, 베트남 사람' 등 이런 나라엔"놈"자를 붙이지 않는다.

25. 한국의 산야는 음양이 강하게 충돌하기 때문에 강할 수 밖에 없다. 강한 기는 강한 종자를 생산한다.

26. 한.중.일 삼국 중 한국의 진달래가 가장 예쁘고, 인삼의 질도 월등하다. 물 맛도 최고고, 음식도 정말 맛있다.

27. 세계에서 한국의 꿩처럼 아름다운 꿩이 없고 한국의 한우처럼 맛있는 고기는 없다.

28. 한국인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기가 강한 민족이다.

29. 한국의 독립운동사만 봐도 알 수 있다. 중국은 광활한 대륙, 끝없는사막, 넓은 고원을 언급하며 스스로를 대인(大人)이라고 부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얼핏 대륙에서 태어난 중국인이 마음도 넓고 강할 것 같지만... 결정적으로 보면 한국보다 기(氣)가 약하다.
1932년 일본이 중국에 만주국을 건설하고 1945년 패망하기까지 13년 동안, 난징대학살을 포함 일본에 의해 죽은 사람은 3,200만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중국인이 일본 고위층을 암살한 경우는 거의 전무했다.
그에 비해 한국은 만 35년동안 3만2천명으로 중국 피학살자의 천분의 1에 불과했지만 일본 고위층 암살 시도와 성공 횟수는 세계가 감탄할 정도였다.
1909년 안중근 의사는하얼빈역에서 전 일본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했고, 1932년 이봉창의사는 도쿄에서 일왕(日王)에게 폭탄을 던졌으며, 같은 해 윤봉길 의사는 상해에서 폭탄을 던져 상해 팔기군 시라가와(白川)대장 등 일제 고위 장성 10여명을 살상했다.
1926년에는 나석주 의사가 민족경제파탄의 주범인 식산은행,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고, 조선철도회사에서 일본인을 저격한 뒤 자살했다.

30. 중국과 한국은 타고난 기가 다르다. 광활한 대륙은 기를 넓게 분산시킨다. '기운 빠지는' 지형이다. 반면 한반도는 좁은 협곡사이로 기가 부딪혀 세계에서 가장 기가 센 나라가 됐다. 기가 센 나라에서 태어났으니 기 센 국민이 될 수밖에 없다.

31. 1950년 해방 무렵, 한국은 파키스탄 제철공장으로 견학가고 필리핀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제는 역으로 그들이 한국으로 배우러 온다. 국력으로 치자면 끝에서 2,3번째 하던 나라가 이제 세계 10위권을 넘보고 있다.

32. 현재 한국은 중국에게 리드당할까봐 겁내고 있다. 절대 겁내지 마라. 중국과 한국은 기(氣)부터 다르다. 세계 IT 강국의 타이틀은 아무나 갖는 자리가 아니다.
180년 주기로 한국의 기운은 상승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다. 어느 정도의 난관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틀림없이 이를 극복하고 도약하리라 믿는다.

한국의 객관적 지표들이 현저히 나빠지고 있다. 보다 큰 불행의 전주곡들도 여기저기서 들려오는듯 하다.
하지만, "궁즉통 극즉반(窮則通 極則反):궁하면 통하고 극에 달하면 반전하게 된다"이라 하였으니 머지않아 반전의 기회가 오리라 믿는다.

한국인은 필리핀이나 아르헨티나, 그리스처럼 추락할 때까지 절대 지켜만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화이팅!!

힘내라! 대한민국!!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를.추모하며.
오늘 그는 차가운 땅에 묻힌다. 육신은 묻히지만 그 정신만큼은 민들레홀씨처럼 널리널리 퍼져나가리라나는 확신을 가지며, 그가 홀로 첼로를 즐겨 연주했다는 ‘솔베이지의 노래’를 그에게 올린다.

http://blog.naver.com/ji_min_hwan/10134588645

서울PBC평화방송소년소녀합창단 - Solveig's song (솔베이지의 노래)

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가고 봄은 가고 그 여름이 가면 더 세월이 간다. 세월이 간다.
아, 그러나 그 떄는 행복이다. 행복이로다. 내 정성을 다해 늘 고대하노라 늘 고대하노라.
아, 그 풍성한 복을 참 많이 받고, 참 많이 받고. 오, 우리 하느님 늘 보호하소서. 늘 보호하소서.
쓸쓸하게 홀로 고대함이 그 몇 해 인가. 아, 나는 그리워라. 찾아가노라. 찾아가노라.

< 빈곤의 해법 >

사람은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가난하게 사는 걸까. 아니면 가난하기 때문에 머리가 나빠지는 걸까.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1988년생으로 올해 나이 서른이다. 그는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해법>(2017)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워싱턴 포스트'와 '가디언'이 이 책으로 특집 기사를 다룰만큼 논쟁적인 책이기도 하다. 그는 테드(TED) 강연에 출연해 2017년 테드 Top10에 오르기도 했다. 테드팀은 브레흐만을 일컬어 '유럽을 대표하는 가장 전도유망한 젊은 지성'이라고 표현했다.

브레흐만의 사상은 영국에서 신자유주의를 이끌던 마가렛 대처의 말 한 마디에서 출발한다. "가난은 개인적인 약점과 같은 말이다." 이 말은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본인이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브레흐만은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었고 빈곤은 가난한 사람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센딜 멀레이너선'과 '엘다 샤퍼' 교수의 공저 <결핍의 경제학>에서 '사람은 가난할 수록 I.Q가 떨어진다'는 연구에 흥미를 가졌다.

멀레이너선과 샤퍼 교수는 인도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농부들을 상대로 I.Q 테스르를 했다. 농부들은 1년에 한 번 수확을 하는데, 테스트는 수확하기 한 달 전인 가장 빈곤한 시기와 수확을 마쳐 주머니가 두둑한 시기, 이렇게 두 번 했다. 그런데 빈곤한 시기보다 풍요로운 시기의 지능이 10%나 향상돼 있었다. I.Q는 선천적인 게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은 가난할 수록 생계에 대한 걱정으로 그 문제에 집중하다 보면 수리능력, 인지능력이 떨어져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브레흐만은 이 실험의 공동 연구자였던 샤퍼 교수를 만나 다음과 같이 물었다. "교육방식을 바꾸면 좀 나아질까요?" 이에 샤퍼 교수는 "교육을 바꾸면 안바꾸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빈곤을 해결하지 않고 교육만 바꾸는 건, 수영하는 법만 가르쳐주고 망망대해에 던져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죠."라고 대답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가지세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세요"라는 식의 심리치료는 그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캐나다 도핀이라는 도시에서 1974~1979년까지 5년 동안 기본소득에 대한 실험을 했다고 한다. 최저소득을 보장해준다는 의미에서 ‘민컴(MINCOM) 프로젝트'라고 불렀다. 그런데 집권당이 보수당으로 바뀌면서 이 통계 자료는 그냥 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25년 후 경제학자인 에블린 포르제에 의해서 민컴 프로젝트는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다. 자료는 자그마치 2천 개나 되는 박스에 보관돼 있었다. 포르제 교수는 박스의 자료를 모두 검토한 결과 매우 놀라운 통계 자료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자료에 의하면 기본소득 실시 이후 마을 주민들의 I.Q가 향상돼 있었고, 병원 입원률도 8.5%나 감소했으며, 가정폭력도 현저하게 줄어 있었고, 정신병 환자도 크게 감소했다고 한다. 기본소득을 제공하면 게을러져서 일을 안할거라는 선입관은 기우에 불과했다. 주민들이 일을 안했던 시기는 공부를 더 하거나 아이를 낳기 위해 쉬었던 때밖에는 없었다고 한다. 기본소득은 저출산 해결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브레흐만은 우리가 가난하게 사는 건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독설을 날린다. "부자인 우리는 가난에 대해서 무엇이 최선인지 아는 척 하는 걸 제발 멈춰야 된다. 얼굴도 본 적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줄까, 교육을 고칠까 이런 동정적 시선도 멈춰야 한다. 그리고 수많은 온정주의적 관료들과 학자들도 다 없애버려야 한다. 그럴바에는 그냥 그 관료들과 학자들이 받는 월급을 빈민들에게 나눠줘라."

브레흐만이 말하는 핵심은 '빈곤을 없애자'는 것이다. 돌려 말하지 말고 빈곤을 해결할 직접적인 방법을 찾아나가자는 것이다. 그게 기본소득이든 토지공개념이든 빈곤을 없애면 먹고 살기 위해 쏟는 에너지를 다른 곳에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가난한 사람들이 소비하는 가장 큰 에너지는 '먹고 살자'에 있다. 그리고 내 자식도 좀 '먹고 살자'라는 것이다. 빈곤이 사라지면 가난은 대물림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브레흐만이 테드 강연에서 했던 마무리 발언이다. "마틴 루터 킹은 '나에게는 악몽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죠. 그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꿈이 있다고 말하려고 합니다.... 빈곤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연구 결과도 있고 증거도 있고 방법도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안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제 2017년 10월 17일 화요일 봉하마을을 다녀왔다. 부산 출장길에 서울로 가기 전에 가서 뵙고자 했고, 처음엔 쏘카를 이용할까 하다가 혼자서 움직이니까 대중교통이 나을 것 같아서 알아본 대중교통 이용방법을 소개하고 싶어서 글을 정리한다.

아래는 내가 가보았던 방식을 설명한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알려주시길..

1. 서울에서 부산가는 방법은 KTX 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평일엔 시간만 잘 맞으면 오히려 비행기 값이 싼 경우가 있으니 참고하시길.. 내 경우는 52,000원 정도 들었음 (땅콩항공 편도)

2. KTX 는 진영까지 가는 편이 종종 있으니 확인하시길.. (진영역에서 10번버스 타면 봉하마을까지 20분)
   10번 버스 시간표는 4번 항목 참고..

3. 부산역에서는 2호선타고 사상역에서 김해경전철로 갈아타서 봉황역으로~ (30분 정도 소요)
   김해공항에서는 김해경전철타고 봉황역으로~ (10분 정도 소요)

4. 봉황역 1번출구에서 14번을 타고 진영역으로 가서 10번을 갈아타고 봉하마을에서 내리면 됩니다.
   14번은 약 15분간격 배차, 10번은 아래 시간표 참고. 김해 10번 버스 시간표

   오는 방법은 봉하마을에서 역순으로 가면 되지만 김해터미널에서 내려서 봉황역에서 김해경전철을 타야 합니다.

평일/기점[진영역(KTX) (2017.05.23 시행)]
06:25 15:00
07:00 15:45
07:30 16:30
08:20 17:30
09:10 18:30
09:45 19:15
10:40 20:00
11:10 20:30
12:00 21:00
12:50 21:30
13:30
14:20
평일/종점[봉하마을(2017.05.23 시행)]
06:50 14:50
07:25 15:30
08:00 16:30
08:50 17:30
09:40 18:15
10:15 19:00
11:10 19:45
12:10 20:30
13:00 21:00
13:30
14:00

 

5. 자주 다니지는 않지만 시간만 잘맞으면 빠르게 가는 좋은 방법은 김해경전철 부원역에서 300번 버스를 타는 방법입니다. 저는 이걸 탔습니다. 빠르고 좋습니다. 약 40분도 안되어서 부원역에서 봉하마을까지 바로 갑니다. 오는 방법은 역순입니다. 김해 300번 버스 시간표

 

평일/[부원역]

07:15

15:05

09:45

17:35

12:25

20:35

 

평일/종점[봉하마을]
08:10 16:05
10:45 18:30
13:20 21:30

 

아무쪼록 즐거운 여행 되시길..

출처: http://libertypost.kr/archives/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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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견은 좀 나중에 올립니다.. 일단 퍼나르기..
출처? 저도 카톡에서 보고 퍼나른 것인지라..^^


강준만 교수가 진보의 최후 집권 전략으로 ‘싸가지 있는 정치’를 제시했다. 상대편을 존중하는 마음과 자세의 터전 위에 서야만 민심을 제대로 읽는 눈이 트여 집권이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집권 후에도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집권 후의 성공까지 거론한 이유는, ‘싸가지 문제’가 선거는 물론 평소의 정치에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좋은 정책과 이념이라도, 싸가지 없게 행한다면 유권자들은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강준만 교수는 진보의 ‘이성 중독증’을 지적한다. 이성 중심의 정치관이 싸가지 문제를 사소하게 보는 데에 일조했다는 것이다.

진보의 싸가지 문제란, ‘무례함, 도덕적 우월감, 언행 불일치’ 등이다. 예컨대,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는 행위, 담론에만 집중한 나머지 예의를 벗어난 표현,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는 태도, 왜 진보를 좋아하지 않고 보수에 표를 찍냐고 호통치는 듯한 자세, 의견이 맞지 않으면 동료에게도 상처를 주고야 마는 행위, 번드르하게 말해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입장을 바꾸는 태도 등이다. 지금부터 싸가지 문제가 어떻게 진보를 나락에 빠뜨렸는지 실감나게 관전해보자.

임태주 시인 어머니의 편지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 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애미를 용서하거라. 

부박하기 그지없다.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 날은 해가 나고, 맑구나 싶은 날은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 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애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 줄 것이다.

별 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니 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일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티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대로 순순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트랙백을 걸 수 없어서리.. 근데 Acase 여기 좋은 글 참 많네..

원문 : http://acase.co.kr/2013/12/24/writinglecture27/

[두 대통령과 함께한 전략적 글쓰기 27] 대통령이 강조했던 글쓰기 지침


관저 식탁에서의 2시간 강의
- 노무현 대통령의 글쓰기 지침

2003년 3월 중순, 대통령이 4월에 있을 국회 연설문을 준비할 사람을 찾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늘 ‘직접 쓸 사람’을 보자고 했다.
윤태영 연설비서관과 함께 관저로 올라갔다.

김대중 대통령을 모실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통령과 독대하다시피 하면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다니.
이전 대통령은 비서실장 혹은 공보수석과 얘기하고, 그 지시내용을 비서실장이 수석에게, 수석은 비서관에게, 비서관은 행정관에게 줄줄이 내려 보내면, 그 내용을 들은 행정관이 연설문 초안을 작성했다.

그에 반해 노무현 대통령은 단도직입적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를 원했다.
“앞으로 자네와 연설문 작업을 해야 한다 이거지? 당신 고생 좀 하겠네. 연설문에 관한한 내가 좀 눈이 높거든.”

식사까지 하면서 2시간 가까이 ‘연설문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특강이 이어졌다.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열심히 받아쓰기를 했다.
이후에도 연설문 관련 회의 도중에 간간이 글쓰기에 관한 지침을 줬다.

다음은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 자네 글이 아닌 내 글을 써주게. 나만의 표현방식이 있네. 그걸 존중해주게. 그런 표현방식은 차차 알게 될 걸세.
2. 자신 없고 힘이 빠지는 말투는 싫네.
‘~ 같다’는 표현은 삼가 해주게.
3. ‘부족한 제가’와 같이 형식적이고 과도한 겸양도 예의가 아니네.
4. 굳이 다 말하려고 할 필요 없네. 경우에 따라서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도 연설문이 될 수 있네.
5. 비유는 너무 많아도 좋지 않네.
6. 쉽고 친근하게 쓰게.
7. 글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고 쓰게. 설득인지, 설명인지, 반박인지, 감동인지
8. 연설문에는 ‘~등’이란 표현은 쓰지 말게. 연설의 힘을 떨어뜨리네.
9. 때로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도 방법이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킹 목사의 연설처럼.
10. 짧고 간결하게 쓰게. 군더더기야말로 글쓰기의 최대 적이네.
11. 수식어는 최대한 줄이게. 진정성을 해칠 수 있네.
12. 기왕이면 스케일 크게 그리게.
13. 일반론은 싫네. 누구나 하는 얘기 말고 내 얘기를 하고 싶네.
14. 추켜세울 일이 있으면 아낌없이 추켜세우게. 돈 드는 거 아니네.
15. 문장은 자를 수 있으면 최대한 잘라서 단문으로 써주게.
탁탁 치고 가야 힘이 있네.
16. 접속사를 꼭 넣어야 된다고 생각하지 말게.
없어도 사람들은 전체 흐름으로 이해하네.
17. 통계 수치는 글을 신뢰를 높일 수 있네.
18. 상징적이고 압축적으로 머리에 콕 박히는 말을 찾아보게.
19. 글은 자연스러운 게 좋네. 인위적으로 고치려고 하지 말게.
20. 중언부언하는 것은 절대 용납 못하네.
21. 반복은 좋지만 중복은 안 되네.
22. 책임질 수 없는 말은 넣지 말게.
23. 중요한 것을 앞에 배치하게. 뒤는 잘 안 보네. 문단의 맨 앞에 명제를 던지고, 그 뒤에 설명하는 식으로 서술하는 것을 좋아하네.
24. 사례는 많이 들어도 상관없네.
25. 한 문장 안에서는 한 가지 사실만을 언급해주게. 헷갈리네.
26. 나열을 하는 것도 방법이네. ‘북핵 문제, 이라크 파병, 대선자금 수사…’ 나열만으로도 당시 상황의 어려움을 전달할 수 있지 않나?
27. 같은 메시지는 한 곳으로 몰아주게. 이곳저곳에 출몰하지 않도록
28. 백화점식 나열보다는 강조할 것은 강조하고 줄일 것은 과감히 줄여서 입체적으로 구성했으면 좋겠네.
29. 평소에 우리가 쓰는 말이 쓰는 것이 좋네. 영토 보다는 땅, 치하 보다는 칭찬이 낫지 않을까?
30. 글은 논리가 기본이네. 좋은 쓰려다가 논리가 틀어지면 아무 것도 안 되네.
31. 이전에 한 말들과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네.
32.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은 쓰지 말게. 모호한 것은 때로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지금 이 시대가 가는 방향과 맞지 않네.;
33. 단 한 줄로 표현할 수 있는 주제가 생각나지 않으면, 그 글은 써서는 안 되는 글이네.

대통령은 생각나는 대로 얘기했지만, 이 얘기 속에 글쓰기의 모든 답이 들어있다.
지금 봐도 놀라울 따름이다.

언젠가는 음식에 비유해서 글쓰기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1. 요리사는 자신감이 있어야 해. 너무 욕심 부려서도 안 되겠지만.
글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야.
2. 맛있는 음식을 만들려면 무엇보다 재료가 좋아야 하지. 싱싱하고 색다르고 풍성할수록 좋지. 글쓰기도 재료가 좋아야 해.
3. 먹지도 않는 음식이 상만 채우지 않도록 군더더기는 다 빼도록 하게.
4. 글의 시작은 에피타이저, 글의 끝은 디저트에 해당하지. 이게 중요해.
5. 핵심 요리는 앞에 나와야 해. 두괄식으로 써야 한단 말이지. 다른 요리로 미리 배를 불려놓으면 정작 메인 요리는 맛있게 못 먹는 법이거든.
6. 메인요리는 일품요리가 되어야 해. 해장국이면 해장국, 아구찜이면 아구찜. 한정식 같이 이것저것 다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의 메시지에 집중해서 써야 하지.
7. 양념이 많이 들어가면 느끼하잖아. 과다한 수식어나 현학적 표현은 피하는 게 좋지.
8. 음식 서빙에도 순서가 있잖아. 글도 오락가락, 중구난방으로 쓰면 안 돼. 다 순서가 있지.
9. 음식 먹으러 갈 때 식당 분위기 파악이 필수이듯이, 그 글의 대상에 대해 잘 파악해야 해. 사람들이 일식당인줄 알고 갔는데 짜장면이 나오면 얼마나 황당하겠어.
10 요리마다 다른 요리법이 있듯이 글마다 다른 전개방식이 있는 법이지.
11. 요리사가 장식이나 기교로 승부하려고 하면 곤란하지. 글도 진정성 있는 내용으로 승부해야 해.
12. 간이 맞는지 보는 게 글로 치면 퇴고의 과정이라 할 수 있지.
13. 어머니가 해주는 집밥이 최고지 않나? 글도 그렇게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야 해.

이날 대통령의 얘기를 들으면서 눈앞이 캄캄했다.
이런 분을 어떻게 모시나.
실제로 대통령은 대단히 높은 수준의 글을 요구했다.
대통령은 또한 스스로 그런 글을 써서 모범답안을 보여주었다.

나는 마음을 비우고 다짐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가 아니라 대통령에게 배우는 학생이 되겠다고.
대통령은 깐깐한 선생님처럼 임기 5년 동안 단 한 번도 연설비서실에서 쓴 초안에 대해 단번에 오케이 한 적이 없다.

강원국 (라이팅 컨설턴트, 객원 필진)

 

다음 아고라에 박정희와 우리 사회에 대해 잘 설명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소울메이커님의 글입니다.
원문은 http://durl.me/6a2iz3

그리고 경제발전이 박정희의 성과가 아니라 박정희 반대로 하니 성공하더라 는 이야기를 프레이저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프레이저보고서의 내용을 다큐형식으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들었습니다. 아직 1편만 나왔네요.. 좀 깁니다만 한번 보시길 권합니다.

** 프레이저보고서란? 간단히 말해 미국에서 박정희에 대해 조사해서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올해 쉰둘 먹은 사람이 씁니다 [217] 소울메이커 (cha***)

어쩌다 쉰둘이란 나이가 되버렸네요.

박정희는 18년간 절대권력이었습니다.

북한에 김일성이 있었다면 남한엔 박정희가 있었던 거지요.

철권통치를 유지하려면 피지배세력에 대한 통제는 기본이고

그걸 위해서는 정신을 통제해야 하는 건 당연지사죠.

 

따라서 박정희 철권통치 18년간 지독한 세뇌교육이 이어졌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땐 간첩잡는 이벤트도 했었죠.

바바리에 중절모, 검은 색안경 낀 사람을 발견해서 선생님한테 신고하면

반공연필을 상으로 주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세뇌는 말그대로 뇌를 씻어버리는, 그래서 이성을 마비시키는 정신세계의 파멸을 불러옵니다.

이성이 작동할 때는 사물의 취사선택이 가능하지만 그것이 마비된 이후엔

그냥 주입된대로 움직이는 로봇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죠. 히틀러 압제 하의 독일이 그랬고

히로히토를 정점으로 한 일본군국주의가 그랬고 박정희 철권통치체제가 그랬습니다.

 

다행히 독일은 빠져나왔지만 우경화된 일본은 세뇌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뿐아니라

여전히 자신들이 아시아를 구하려했다는 환상에 빠져있는 상태고 한국의 다까끼 숭배자들은

박정희, 즉 오까모또 미노루가 대한민국을 발전시켰다는 환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박정희가 만군육사-일본육사-일본군 육군중위-남로당 활동-쿠데타-군사독재

이 일련의 인생궤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할 꿈도 꾸지 않으면서

그저 먹고 살게 해줬다(?)는 착각에 빠져있는 분들입니다.

 

박정희가 대한민국을 먹고 살게 해줬다는 억지는

순천향대 김기승 교수의 小考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과 장면'이란 글에서도 잘 설명했듯

쿠데타정권이라는 태생적 컴플렉스가 불러온 경제발전 플랜 공적 가로채기에 불과한 것이고

설령 백보 천보 아니 수천만보 양보해 그놈이 반역자가 됐든 쿠데타세력이 됐든

독재세력이 됐든 그 무엇이 됐든 먹고 살게 해줬으니 그저 장땡이라면 우리가 개 돼지하고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제라도 세뇌에서 깨어나세요.

그분들이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정보, 제대로 된 생각을 갖기만 한다면

세뇌에서 벗어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인거죠.

 

박정희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할 기회조차 없었던 세대,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어떻게 세뇌됐는지, 세뇌의 결과 자신들이 어떤 잘못을 범하고 있는지 모른 다는 게

제일 기가 막힌 일입니다.

 

안타까울 따름이네요.

40살의 솔개는 선택에 직면한다. 

서서히 굶어 죽거나 죽음과 고통에 맞서 환골탈태하거나..

약 3분의 영상입니다. 즐감하시길..

 

원래 포스팅된 주소는 http://blog.naver.com/hks770604/20173842266 입니다. 

 

조작질은 국정원이나 경기동부 것들이나 똑같지만 국정원 너희가 훨씬 나쁜 것들이야..

뉴스타파 고마워요~

 

뉴스타파 - "아고라를 점령하라" 외 (2013.8.29)


1. 탈북자 조직, 돈 받고 여론전 펼쳐

2. 국정원 댓글과 닮은 꼴

3. 영상 - 4대강 국민검증단 금강조사

4. 박근혜 정부, 철도민영화 포기 맞나?

 

원문 : http://www.newstapa.com/m/post/view/id/650

협동조합의 7가지 원칙 - 협동의 경제학 (정태인)
1. 조합원의 참여는 자발적이고 개방적이다.
2. 민주적으로 운영된다.
3. 경제적으로 공동 소유하고 공동 이용한다.
4.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5. 교육과 훈련 및 정보를 제공한다.
6. 협동조합은 서로 협동한다.
7. 협동조합은 지역사회에 기여한다.

서평참고 : 정태인의 협동의 경제학 서평 :: 으뜸벗의살며사랑하며 - http://jangjaehoon.tistory.com/m/post/view/id/134

내가 구상하는 협동조합
- 야학 : 교육기부형 조합 / 대안교육을 포함
- 비정규직 직종별 협동조합 : 파견노동자조합
예) 아파트관리사무소관리조합
- 조합형기숙사
- 쓰레기선별사업장
- 환경교육센터

많다.. 다만 수익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것이 아닌 사회적으로 풍요할 수 있는 목표라면 더더욱 해볼만한 사업이어야 한다.. 문제는 시민의 참여를 어떻게..?

1993년 5월 24일자 한겨레신문 박재동화백 작품

'특강' 검찰코꿰기

근데 코꿰기가 하수들의 수라면 장학생으로 길러내기는 역시 삼성만의 영역..

 

 

이렇게 박종철 열사는 박종운의 거처를 끝내 불지 않고 고문실에서 고통 속에 운명합니다.

박종철 열사의 사망에 검찰은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더라" 라고 발표하고

이는 거센 6월 항쟁의 불씨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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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고...

박종철 열사가 끝까지 지켜준 박종운은...

 

2004년 4월.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에서 한나라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여 선거운동을 벌입니다.

87년 박종철 사망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국 수사 2단장으로서 박종철 열사 사망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했던 의혹을 받고 있는 고문기술자 출신 정형근 (한나라당, 현 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의원이 있던 그 당에서 말이죠. 그걸 떠나 과거 군사독재를 옹호하는 정당에 배경을 업고 권력을 잡고자 출마를 한 것.

박종철 열사는 민주주의 불씨가 되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기폭제가 되었고

 

그, 박종철이 목숨을 바쳐 지켰던 그 선배, 박종운은...

 

 

기록차원에서 남긴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다 문득 이순신 장군이 생각나면서 영웅이 뭘까 생각이 들었다..
참 뜬금없다^^
우야뜬 간단정리하면 수퍼맨과 스파이더맨와 같은 초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알렉산더대왕과 칭기즈칸과 같은 침략전쟁으로 능력을 과시한 인물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면서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낸 사람을 영웅이라 부르고자 한다..

세상은 한두사람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것은 역사속에서 증명되어 오고 있으며 그것을 좌우하기 위해 시도했다 실패한 이는 히틀러와 같은 인물이고 표면적으로 성공한 이가 알렉산더와 칭기즈칸이다..
그러나 그 성공도 그다지 오래지 않은 기간이 지난 후에는 결국 하향안정화가 되었다..

외부의 도전에 내부의 구성원을 슬기롭게 모아내어 함께 극복하는 인물..
이순신이 그랬고.. 광해가 그러했다.. 그리고 백범도..
그럼에도 결론이 개인의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 성공의 댓가가 민중에게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살아서 1등이 되지 못하지만 역사에서는 그들을 영웅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역사에도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영웅들이 있다.. 수없이 많다.. 시대에 저항하며 민중을 보호하고 함께 했던 수많은 이름모를 그들..
그리고 스스로가 민중인 그들.. 바로 우리..

나는 그들을 존경한다.. 나의 영웅이다..

아침에 출근하며 간만에 트윗보다가 거기에 연결되어 있는 영상보다 혼자 찔끔거렸습니다..

그래서... 나혼자 찔끔거리면 놀림받을까 두려워 여러분도 울려볼까 합니다..

 

 

 

김광석-그대 잘가라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피기는 쉬워도 아릅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 바람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가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 바람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가라
그대 잘가라.. 그대 잘가라...


잊지 말아야 함..

노대통령을 능멸하고 벼랑에서 등떠민 홍만표이인규


조소하고 있는 홍만표와 이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