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찾았는데 상당히 괜찮은 유틸..
https://www.diskinternals.com/linux-reader/

이 걸 소개받은 블로그는 아래와 같다.
Ubuntu EXT4 파일을 Windows 10 에서 읽기/쓰기 (tistory.com)

1. 우선 내부네트워크에서 제어받을 컴터를 설정
   1) 제어판 - 시스템 - 원격설정 - 원격 탭 (최근 판은 설정 - 시스템 - 원격 데스크톱 으로 들어가게 됨)
   2) 이 컴퓨터에 대한 원격 연결 허용 
       바로 아래 네트워크 수준 블라블라 는 체크 해제
   3) 여기까지 하면 내부 네트워크에서 ip로 원격데스크톱 연결이 가능함
       (윈도키+R - mstsc /v:192.168.0.123 /f)

** 원격데스크톱으로 연결할 때 [사용자 계정 제한(예: 사용 시간 제한) ] 메시지가 나온다면 계정 암호가 비었기 때문..
      가. 암호를 설정하거나 
      나. 빈 암호를 계속 사용하려면.. 로컬그룹정책편집기 실행 (윈도키+R - gpedit.msc)
          [컴퓨터 구성] -  Windows 설정 - 보안 설정 - 로컬 정책 - 보안 옵션 
             - '계정 : 콘솔 로그온 시 로컬 계정에서 빈 암호 사용 제한' 해제

** 원격데스크톱으로 로그온하면 대상 컴터는 대기화면(로그인전 화면)으로 바뀜.. 
   대상 컴퓨터에서 직접 로그인하면 원격데스크톱은 연결해제 됨

2. 외부네트워크 즉 인터넷을 통해 접근하려면
   1) 방화벽 인바운드 규칙 추가
      - '고급 보안이 포함된 Windows Defender 방화벽' 검색 및 실행
      -  인바운드 규칙에서 아래 두 모드 모두 '사용함' 체크, '연결허용' 선택 처리 (기본 포트번호는 둘다 3389)
         - 원격 데스크톱 사용자 모드 (TCP-in)
         - 원격 데스크톱 사용자 모드 (UDP-in)
   2) 공유기에서 포트포워드
      - 외부 TCP 포트  12345 -> 내부IP 123 에 3389 로 했을 때 
        (윈도키+R - mstsc /v:sample.co.kr:12345 /f)

참고 : https://gyeongsang.kr/562

■■■■■  본문에서 이 색깔은 본인의 환경에 맞게 수정  ■■■■■

** 이 글은 간이서버를 구성하기 위해 이래저래 설정해 왔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한 내용임
   -- 메인 공유기가 아니라 DHCP 기능을 죽인 허브모드로 작동함

** 내가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 놓은 것이니 다른 분들은 그저.. 그저.. 참고만 하시길..

** 아파치, mysql 설정 등은 여기서 참고하였음 https://100sang.net/145

** 소감은 꽤 괜찮은 저장소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 (a3004ns 도 거의 같지만 아파치,mysql 등은 사용할 수 없음)

1. 외장하드드라이브를 연결하게 되면 참고할 점.
   - 가급적이면 포맷형식은 EXT4 로 하시는게 안정적임 (포맷하는 툴은 나중에 포터블형식을 링크해 드리겠음)
   - USB3.0이 지원되는 포트를 가지지만 USB3.0 을 사용하려면 고급-시스템관리-기타 메뉴에서 usb3.0으로 바꿔줘야 함
     단.. 2.4GHz 무선AP와 뭔가 간섭이 있는 듯 하니 참고하시길..

2. ftp 포트를 21이 아닌 포트로 바꾼다면 FTP비정규포트 에 등록을 해줘야 함..
   메인 공유기 (Iptime 공유기) : 고급설정-NAT/라우터관리-고급NAT설정 에서 FTP비정규포트에 바뀐 포트번호 추가

3. 지금은 다른일에 바쁘니 나중에 계속 추가하겠음

** 이 포스트는 내가 해본 내용을 기준으로 작성한 기록이므로 다른 이들은 참고가 되지 않을 수 있음
** 설정 디렉토리 및 파일이 버전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안되면 다시 찾아야 할 것임

1. OS 설치
   1) 종류는 다양하게 있으니 찾아보셔야..
   2) 여기선 기본 라즈비안에 데스크톱 없는 모델 LITE 설치. 간이서버로 이용하기 위해..

2. 설치방법 : 윈도를 기준으로 설명함
   1) 라즈베리파이재단의 프로그램 : 설치형. 쉬움. 간단함. Raspberry Pi Imager
      - 윈도에 설치해야 함. https://www.raspberrypi.com/software/
   2) 포터블방식 : 설치안해도 됨. 참고 https://yourjune.tistory.com/956
      - 이미지굽는앱 etcher 포터블다운로드 https://www.balena.io/etcher/ 
      - 이미지 다운로드 https://www.raspberrypi.com/software/ Manually install 에서 다운로드 
   3) No Desktop 방식은 초기id/pw를 pi / raspberry 로 로긴하고 passwd 명령을 통해 변경.
      root pi 모두 바꿔야 함.. 안그러면 털리 수 있음.  참고 https://www.maum.pro/46

3. 네트워크설정 : 참고 https://ansan-survivor.tistory.com/44
   1) 자기정보 보기 : ifconfig
   2) 네트워크 정보 수정 : sudo nano /etc/dhcpcd.conf (vim 에디터 쓸 사람은 nano 대신 vim 또는 vi 를)
   3) 나머지는 위 참고 블로그에서 읽어보시길.. 나름 성공했음
      -- 해보니까 subnet mask는 설정하지 않아도 되는 듯 함.. 해보니까 되는데 무슨 문제가 있을지 모르겠음.

4. SSH 서버 설정
   1) 제일 쉬운 방법은 sd card의 drive 에 ssh 라는 파일을 만드는 방법 (소문자, 확장자 없음)
   2) 접속 클라이언트는 PUTTY 가 있지만 mobaxterm 이것도 괜찮은 듯 함. 포터블도 있음.
       https://mobaxterm.mobatek.net/
   3) 나머지 방법은 이 블로그 참고 https://m.blog.naver.com/opusk/220984515191

*** 이후 작업은 SSH로 접속하여 진행함..
5. FTP 서버 설정 참고 https://lunasword.tistory.com/37
   1) sudo apt-get upgrade
   2) sudo apt-get update
   3) sudo apt-get install vsftpd
   4) sudo nano /etc/vsftpd.conf 열어서 아래 내용을 활성화하거나 화일 맨 끝에 추가함
anonymous_enable=NO
local_enable=YES
write_enable=YES
local_umask=022
chroot_local_user=YES
chroot_list_enable=YES
chroot_list_file=/etc/vsftpd.chroot_list
   5) sudo nano /etc/vsftpd.chroot_list 실행해서 ID pi 넣고 저장 esc + ctrl_X
   6) sudo service vsftpd restart 재실행
   7) FTP 클라이언트로 접속 테스트.. 나머지 ID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적용함
   8) 참고로 사용자 추가는 여기 참고 https://flyingdeuk.github.io/posts/Pi-user/
   9) 좀더 자세한건 참고 블로그 방문

6. 웹서버 설정 APM  참고 https://bugwhale.tistory.com/39
   1) 아파치2 설치 sudo apt install apache2
       보통 /var/www/html 가 기본이 되는데 이 폴더들에 대한 권한을 특정ID에 부여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ftp 등으로 html 파일 등을 변경할 수 있음..
       chown 사용자ID /var/www 그리고 /var/www/html
       chgrp 사용자ID /var/www 그리고 /var/www/html

   2) PHP 설치 sudo apt install php php-fpm php-curl php-gd php-intl php-mbstring php-mysql php-soap php-xml php-xmlrpc php-zip libapache2-mod-php
   3) PHP 설치확인 
      sudo nano /var/www/html/phpinfo.php 해서
      <?php phpinfo(); ?> 입력하고 저장한 후 
      브라우저에서 http://192.168.0.???/phpinfo.php 로 접속하여 PHP 정보를 확인함
   4) MariaDB 설치
      설치 : sudo apt-get install mariadb-server
      초기보안설정 sudo mysql_secure_installation
         - 초기비번은 없으므로 엔터로 넘어가고 새로 pw를 설정함.. 나머지는 읽으면서 판단..
   5) MariaDB 설치 확인 
      sudo mysql -u root -p
   6) MariaDB 유저추가 : 위 root 로그인 상태에서.. 참고 https://nickjoit.tistory.com/144
      use mysql;     // mysql database 선택
      select host, user, password from user; //현재 유저 확인
      create user 사용자ID identified by '비밀번호'; //이렇게 하면 보통 모든곳에서 접근가능 유저가 됨.. 즉 사용자ID@%
             없앨 땐 drop user 사용자ID;
      show databases; //현재 데이터베이스들 보여줌
      create database 데이터베이스이름 default character set utf8; //문자형식을 utf8로 해야 한글이 안깨질 것임...
             없앨 땐 drop database 데이터베이스이름
      GRANT ALL privileges ON 데이터베이스이름.* TO 사용자ID IDENTIFIED BY '비밀번호';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모든 권한을 사용자에게 부여함..
      FLUSH privileges; //DB에 저장 최종 승인
   7) MariaDB 외부 client 하이디 HeidiSQL 참고: https://freehoon.tistory.com/53
      sudo nano /etc/mysql/mariadb.conf.d/50-server.cnf  //bind-address = 0.0.0.0 로 바꿈
      sudo systemctl restart mariadb //start stop restart
      sudo iptables -A INPUT -p tcp --dport 3306 -j ACCEPT //외부접속 포트허용
      sudo iptables -A OUTPUT -p tcp --dport 3306 -j ACCEPT //내부접속 포트허용
      sudo iptables-save //변경사항저장
      외부접속클라이언트 http://www.heidisql.com/ 포터블도 있음 

   8) phpMyAdmin 은 설치하지 말길.. 보안상 문제가 있음.. 하이디 또는 기타 클라이언트를 이용할 것을 권함

7. 기타

 

 

 원격으로 컴퓨터 켜기
 - WOL (Wake On Lan) 설정 이용

1. Bios 설정
  가. ASUS UEFI 기준 
F8키 - 어드밴스드 메뉴 - APM Configuration Power On By PCI-E - Enabled 바꿈
  나. ASLock
Advanced - ACPI Configuration - PCI Devices Power On - Enabled로 바꿈
  다. MSI
Advanced - Wake Up Event Setup - Resume By PCI-E Device - Enabled로 바꿈

2. 윈도 랜카드 WOL 활성화 : 보통 되어 있음..
  가. 제어판\네트워크 및 인터넷\네트워크 연결 로 이동
  나. 이더넷 - 속성 - [구성] 버튼 - 고급탭 - Wake On, WOL, 웨이크온 관련 3개 모두 enable/사용 으로 바꿈..

3. 공유기 WOL 활성화 - Iptime 기준
  가. WOL 할 PC로 접속해야 편함..
  나. 고급설정 - 특수기능 - WOL 기능 - 현재접속된PC의 맥설정 - 추가
  다. 완료 (외부에서 하려면 DDNS 설정해야 함)

4. 원격에서 켜기
  가. 공유기에 들어가서 고급설정 - 특수기능 - WOL 기능 - 해당PC - PC켜기 클릭하면 전송되고 pc 켜짐..
  나. IPTIME의 경우 DDNS 설정을 하면 외부에서도 공유기에 접속이 가능함.. (iptime.org:포트)
  다. IPTIME 앱이 있음.

5. 절전모드나 최대절전모드일 때 안됨. 아래 내용 참고하여 진행하면 가능함
  가. 이더넷 속성 - [구성] - 전원관리 탭
       - 전원을 ~~ 끌 수 있음(A)   체크
       - 이 장치를 ~~ 종료할 수 있음(O)   체크
  나. 참고한 블로그 최대 혹은 그냥 절전모드에서 wol 기능으로 원격으로 컴퓨터 켜기 – bluelog.kr

1. 현재기준(2022년3월) 포터블

따로zip으로 압축해놓은 파일 다운로드 받기 

2. FileZilla 홈페이지에서 직접 다운로드 받기
포터블은 Show additional download options 를 클릭해서 봐야 함..
Download FileZilla Client for Windows (64bit x86) (filezilla-project.org)

3. 참고로 팀뷰어12 포터블 다운로드

팀뷰어12 다운로드 링크 

2022년 2월 24일부터 2박..
방학이 끝나기 전 놀러 왔다..

현대식 연립건물
깨끗함
앞 정자도 좋고 뒤로 돌아 말티재로 연결된 임도도 좋음

소소한 결함은 있으나 조용하고 좋다..

말티재 전망대는 열두구비 꼬부랑길 보기 좋고..
법주사는 입장료 오천원 내고 한번, 한번 가기 좋았음
더는 안갈 예정..

신라식당은 음식이 담백하니 좋았으나 가격은 가벼운 한정식가격임..

AND            NAND 는 NOT AND
=======================
1 - 1 : 1        0
1 - 0 : 0        1
0 - 1 : 0        1
0 - 0 : 0        1

OR             NOR 는 NOT OR
=======================
1 - 1 : 1        0
1 - 0 : 1        0
0 - 1 : 1        0
0 - 0 : 0        1

 

XOR (Excluisive OR : 서로 다르면 참)
=======================
1 - 1 : 0         
1 - 0 : 1 
0 - 1 : 1 
0 - 0 : 0 

XOR 는 NAND - OR - AND 로 대체 가능
=======================
1 NAND 1 : 0        1 OR 1 : 1        0 AND 1 : 0        
1 NAND 0 : 1        1 OR 0 : 1        1 AND 1 : 1         
0 NAND 1 : 1        0 OR 1 : 1        1 AND 1 : 1         
0 NAND 0 : 1        0 OR 0 : 0        1 AND 0 : 0         

1. 윈도 파워쉘(powershell) 관리자모드 실행

2. 아래 내용 중 빨간색만 바꿔서 파워쉘에 붙여넣고 실행하기.. (대소문자 구분 안함)
  Get-AppxPackage *3dbuilder* | Remove-AppxPackage

3. 윈10 기본 앱 이름들
3D Builder(3D빌더) 3dbuilder
Alarms and Clock(알람 앤 클락) windowsalarms
Calculator(계산기) windowscalculator
Calendar and Mail(캘린더 앤 메일) windowscommunicationsapps
Camera(카메라) windowscamera
Get Office(오피스) officehub
Get Skype(스카이프) skypeapp
Get Started getstarted
Groove Music(그루브 뮤직) zunemusic
Maps(맵스 지도 어플) windowsmaps
Microsoft Solitaire Collection solitairecollection
Money(머니) bingfinance
Movies & TV(무비 앤 티비) zunevideo
News(뉴스) bingnews
OneNote(원노트) onenote
People(피플) people
Phone Companion(폰 컴패니언) windowsphone
Photos(포토 사진 관리 앱) photos
Store(윈도우 앱스토어) windowsstore
Sports(스포츠) bingsports
Voice Recorder(보이스 레코더) soundrecorder
Weather(웨더. 날씨 어플) bingweather
Xbox(엑스박스) xboxapp

3. 만약 지운 것을 살리고 싶으면 윈도우 어플 스토어에서..

4. 모두 되돌리고 싶다면
Get-AppxPackage -AllUsers| Foreach {Add-AppxPackage -DisableDevelopmentMode -Register “$($_.InstallLocation)\AppXManifest.xml”}

이 자료를 가져온 곳 참고 : 윈도우10 최적화 방법 하나, 윈10 기본앱 삭제하기(엑스박스, 스카이프 등) :: Download Box (tistory.com)

 

윈도우10 최적화 방법 하나, 윈10 기본앱 삭제하기(엑스박스, 스카이프 등)

윈도우10이 이제 점점 깔리고 있죠. 개인적으로 써보니 아직 살짝 불안정한 부분이 있고 일부 호환성이 해결이 덜됐다는 글도 보이기도 하는데요. 저는 만족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startdownload.tistory.com

 

전국에 막 코로나 3단계로 접어드는 시기에 단양여행을 다녀왔다. 간단하게 잊지 않기 위해 메모해 둔다.

0. 대전에서 안동으로 가서 임청각과 이육사생가를 들렀다, 그리고 풍기에서 청국장을 먹고 숙소인 단양으로 향했다.
   - 임청각은 석주 이상룡선생의 99칸 가옥인데 일제에 의해 낙동각쪽 앞 전각들이 없어지고 중앙선을 개설했다.
   - 석주선생의 사연은 인터넷에 많이 나와 있으므로.. 본명은 이상희 인데 간도로 이주하면서 중국 현지인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 중국으로 귀화하면서 이상룡으로 개명했다고 문화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고.. 독립운동을 위해 임청각을 일본인에게 당시 2천원에 팔았다가 문중이 돈을 모아 그 일본인에게 3천원에 사서 지금은 문중재산으로 되어 있다고 함.
   - 문재인대통령이 당선전 방문하여 임청각 복원을 약속했고 내가 방문한 그 시점에 복원작업이 한창이었다. 2022년 이후에 복원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 풍기청국장은 풍기역 앞에 있는 청국장집으로 정갈한 반찬으로 2021년 현재 1만원의 밥값으로 꽤 괜찮은 식사를 경험했다. 서울도 이정도 못하지는 않지만 독특한 퓨전반찬에 나름 괜찮았다. 자세한건 검색해 보시길

1. 단양 황정산휴양림이 숙소인데 새로 신설했는지 나름 깔끔한 건물이 산림문화휴양관에 묵었다.
   - 코로나라서 편백나무욕조는 사용하지 못했음.. ㅠㅠ
   - 함께 묵었던 분이 청소상태가 안좋다고 하셨음..

2. 단양8경중 5경만 간신히 경험했는데.. 이쁘긴 이쁨..
   - 도담삼봉 : 가장 더울 때 갔음, 하늘이 이뻐서 좋았고 각도에 따라 다른 느낌이므로 한바퀴 높고 낮은 곳에서 살펴보시길
   - 상/중/하선암 : 남한강으로 흘러가는 단양천의 선암계곡의 예쁜 바위를 말함. 바위벽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계곡안의 큰 바위인데 상-중-하 순으로 바위가 작아지는데 이쁜 순서도 상-중-하 순이다. 아이들이 놀기좋기로는 거꾸로다..
여기서 중선암 주차장을 가시게 되면 오랫동안 머물고 놀 예정이 아니라면 길가에 차를 세우는게 좋음.. 사유지라는데 유료라는 표시가 없다가 나갈 때 현수막에 이런 내용으로 써있음. "주차비는 무료이나 뭘 먹고 가든지 아니면 3천원에 생수1병 드림"... 큰 돈은 아니지만 뒤통수 맞는 기분이라 하마터면 싸울 뻔 했다.
   - 사인암 : 바위벽이 멋짐.. 아이들 물놀이하기에도 참 좋음

3. 단양9경이라는 구경시장은 여느 시골장터다. 마늘이 특산물인지 마늘로 제목지은 음식들이 많다. 소문으로 듣던 '마늘만두'는 마늘냄새는 안나고 그냥 평범했고.. 닭강정은 양념을 싫어하는지라 안먹어봣음.. 시장통의 한 슈퍼는 단양막걸리/동동주를 1리터짜리를 2천원, 3천원에 그것도 현금으로 팔길래 나름 신나서 가져왔드만 오늘길에 들른 농협에서 2천원/2천원에 팔드라.. 시장사람들... 그러시면 안됩니다. 신용잃으면 소문도 나빠지고.. 그러면 손님들 없어져요..

4. 오는길에 충주에 들렀는데 중앙탑 주변이 호수공원처럼 예쁘다.. 박물관도 공짜에 내용도 좋다..
충주자유시장에서 무학시장과 이어지는 주변에 순대만두골목이 있는데 많이 싸다.. 거기서 감자만두를 사서 먹어봤는데 만족도 높다. 주인이 아파서 그만뒀다는데 원래 가게이름은 대우분식, 지금은 젊은 사람이 하고 있는데 괜찮았음..

여기까지.. 단양여행 간단한 정리.. 마침

** 여기서는 가급적이면 인터넷에서 발급/납부하고 프린터 출력하는 방식을 기술합니다. 제 경험상 아래의 순서대로 진행하면 혼선없이 잘 마무리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건축물이 없어서 세입자도 없어서 덜 복잡했는지 모르겠지만.. 암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우선 경매낙찰을 하게되면 법원내 집행관실에서 '최고가 매수신고인 증명신청'과 '(경매보증금) 영수증'을 받는다.

2. 2주 이내에 '대금지급기한통지서'가 법원등기로 집으로 온다. (법원등기이기 때문에 본인만 또는 집에서 누군가가..)
   - 우편물에 있는 지급기한까지 낙찰 잔금을 납부해야 하는데
   가. 해당 법원의 담당 경매계에 가서 '법원분담금납부명령서'를 발급 요청을 한다. (납부하러 왔다고 하면 발급해 준다)
   나. 서류를 들고 법원내 은행에 납부하고 납부영수증과 500원짜리 수입인지를 구입해서 다시 경매계로 가면
   다. '매각대금완납증명원'과 '**지법 **지원 매각허가결정' 서를 발급해 준다.

3. 취득세(+농특세+지방교육세) 납부 : 토지/건물이 위치한 시군구청에 가서 하거나 wetax 에서 납부한다.
   - www.wetax.go.kr (회원가입 필수 - 공동인증서 필요)
     가. 취득세 신고 메뉴에서 경락(주택) 또는 경락(토지/건물) 를 선택해서 본인정보, 전소유자정보, 물건정보를 입력함.
          - 팁!  전소유자 정보를 입력하는 란은 그냥 본인 정보를 입력한다. (민원전화 110에 전화해서 확인했음)
     나. 구비서류는 2번에서 받은 매각대금완납증명원 or 매각허가결정서를 스캔/촬영해서 jpg 형태로 업로드함.
     다. [신고접수]를 클릭하면 접수가 되는데 마냥 기다리지 말고 해당 시군구청 취득세 담당자에게 전화하는 것이 좋음.
     라. 접수완료(시군구담당관이 처리)되면 문자로 안내가 온다.
          - 납부서를 출력해서 은행에서 납부하거나
          - [즉시납부] 를 클릭해서 인터넷지로 https://www.giro.or.kr/에서 계좌이체/신용카드 납부가능
     마. 납부영수증을 출력해 놓는다.

4. 등기부등본에서 말소할 사항이 있으면 말소등록세를 납부해야 한다. (1건당 7,200원 2021년 현재)
   가. 인터넷등기소 http://www.iros.go.kr/ 에서 화면하단의 '등록면허세정액분신고' 클릭해서 납부한다.
        - 아래 말소등록세 납부 고지서 작성방법 참고.
   나. 고지서를 출력해서 은행에서 납부 또는 인터넷지로 https://www.giro.or.kr/에서 계좌이체/신용카드 납부가능
   다. 납부영수증을 출력해 놓는다.

5. 소유권이전 및 말소등기 촉탁 신청서를 작성하며서 함께 제출할 서류를 준비하자.
  아래 첨부서류는 미리 작성/출력, 발급/출력 해서 챙겨야 함.
   가. 준비서류
       - 소유권이전 및 말소등기 촉탁 신청서 : 첨부파일 (예시 참고)
       - 말소할 사항 (말소할 각 등기를 특정할 수 있도록 접수일자와 접수번호) : 첨부파일 (예시 참고)
       - 부동산목록 : 준비안해도 사건번호가 있으면 접수창구에서 처리해 준다. (3통)
       - 부동산등기부등본 건물/토지 각 1통 : 인터넷등기소 http://www.iros.go.kr/ 
       - 토지대장 1통 : 정부24 https://www.gov.kr/
       - 건축물대장 1통 : 정부24 https://www.gov.kr/
       - 주민등록등본 1통 : 정부24 https://www.gov.kr/
       - 등록세 영수증 : 3번, 4번에서 납부/출력한 영수증 (취득세인데 등록세라고 표현함.. 이상함..)
       - 등기신청 수수료 – 이전 15,000원(필지당),  말소 1건당 3,000원 (토지, 건물 각각임) : 4번과 달리 법원에 납부하는 수수료로써 해당 법원 내에 있는 은행에서 납부한다.
       - 국민주택채권번호 는 매입금액 을 조회해 두고 법원 내에 있는 은행에서 매입 또는 매입과 동시에 매도한다.
            매입금액계산하기 (만원단위만, 천원단위는 반올림) : http://nhuf.molit.go.kr/FP/FP07/FP0705/FP070504.jsp
       - 우표 6,000원 (등기촉탁시 사용) :  해당법원 내 우체국에서 구입

6. 이제 5번에서 준비한 서류들을 가지고 해당법원 은행과 우체국에서 납부할건 납부하고 구입할건 구입한 후 경매처리 민원실로 가서 제출한다. 그러면 담당관이 서류검토하고 추가할 내용이 있으면 추가보완하라고 친절히 안내해 준다.

 이 블로그는 제가 낙찰 후 등기할 때 참고했던 블로그입니다. https://tmfrlgod22.tistory.com/151

■ 말소등록세 입력방법

첨부파일 : 소유권이전 및 말소등기 촉탁 신청서

소유권이전 및 말소등기 촉탁신청서.hwp
0.02MB

DOS 모드에서 써봤는데 문제가 한글이 지원안되어서 다른걸 찾다가 보니 윈도 툴도 있습디다..
상당히 쓸만 합니다. 무료라 기능제한이 있지만 다양한 기능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합치기에는 좋을 듯 싶습니다.
설치형이고.. 찾아보니 포터블도 있는데 기능이 더 다양하군요^^

설치형 : 압축풀고 셋업실행.. 끝..

pdftk_free-2.02-win-setup.zip
3.28MB

포터블 : 압축풀고 실행하면 포터블 폴더만들어서 압축만 풉니다..
문서를 합치고 나누고 돌리고.. 기타 등등.. 나누는건 1쪽씩 나눠서 같은 폴더에 번호붙여서 pdf로 저장합니다.
굉장히 좋네요.. 

PDFTKBuilderPortable_3.10.0_English.paf.zip
3.27MB

2021년 4월 12일 입찰 및 낙찰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합니다.

[본인 입찰]
1. 매수인(본인) 신분증
2. 인감도장 (본인입찰일 경우 일반도장, 서명도 가능)
3. 매수신청보증금 (최저매각가의 10% 또는 20% 이상. 경매 공고문에서 확인해야 함) 

[대리인 입찰]
1. 위 [본인입찰] 준비물 (도장은 반드시 인감도장)
2. 매수인 위임장 (첨부파일 참고) - 날인되거나 매수인 인감도장 지참

경매위임장.hwp
0.01MB

3. 매수인 인감증명서 1부
4. 대리인 신분증
5. 대리인 도장(인감 or 일반 도장) 

[경매입찰방법] - 블로그 참고 m.blog.naver.com/lawdike/220252608847
* 겁먹지 마세요. 현장에서 담당공무원에게 물어보면 친절히 답해 줍니다.
1. 입찰공고 확인 : 가끔 취소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2. 입찰봉투 작성 - 서류봉투처럼 생겼음
3. 기일입찰표 작성 - 금액 써넣을 때 조심 또 조심하시길
4. 매수신청보증금봉투 - 보증금 (현금 또는 수표)
** 작성할 때 투표소처럼 가려진 곳에서 작성함
*** 완료하면 안내에 따라 제출하면 됩니다.

[낙찰시]
1. 최고가 매수신고인 증명신청 - 집행관실로 가서 신청하면 됩니다.
2. 영수증 발급 - 보증금 영수증을 받아야 합니다. (나중에 잔금 납부시 제출해야 함)
3. 낙찰 부동산이 농지인 경우 '농지취득자격증명'을 받아야 합니다. 해당 토지의 읍면동 행정복지센터에서 발급신청해서 낙찰 1주일 이내에 담당 경매계에 제출해야 합니다. (제출할 때 서류를 또 작성하는데 대리인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이후]
1. 약 10일 전후로 법원등기가 자택으로 날아옵니다. 잔금납부기일을 참고해서 경매계에 가서 납부해야 합니다.
2. 잔금납부 방법 간단히 정리된 블로그 : m.blog.naver.com/tasman53/150172343979

아래 출처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음

1. 아이폰 - 설정 - 일반 - 백그라운드 앱 새로고침 - 음성메모 ON : 꼭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2. 아이폰 음성메모 앱 삭제하고 재설치(앱스토어에서 가능)
   * 앱 삭제 전에 아이폰, 애플워치 음성녹음 백업해야 함
   ** 그 이유는 아이폰에서 앱 삭제하면 둘 다 삭제됨.
   *** 다시 설치하면 아이폰은 음성이 복구되는데 애플워치는 복구안됨 (내 경우는 그랬음)
   **** 아이폰은 파일앱 활용해서, 애플워치는?? 재생->아이폰으로 녹음 후 파일백업.. 전통적인 방법임^^

출처 : blog.naver.com/thunder0429/222161406971

 

애플워치 음성 메모, 녹음 파일이 아이폰에 동기화 안될 때 해결 방법

애플워치의 음성 메모 앱으로 녹음을 하고 아이폰에서 재생하려 했더니 녹음 파일이 보이지 않았다.당연히 ...

blog.naver.com

 

등골이 오싹했었는데.. 다행히 복구되었습니다.

설치해야 하지만 매우 간단하게 설치되고

복구 역시 굉장히 심플합니다.

다만 디스크 전체를 한번 스캔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은 좀 걸립니다.

강추합니다.

무료에... 만드신분.. 복받으세요~ 

아래 네이버 다운로드 링크겁니다. 블로그에도 2021년 1월 말 현재꺼 첨부합니다.

재밌는건 프로그램 자체에는 '복구천사'란 말은 없고 'USB 메모리 복구'라고만 나오는데
설치된 프로그램 폴더는 '복구천사'네요^^ 암튼 잘 활용하시길..

첨부 :

복구천사v8.9.zip
3.46MB
복구천사v8.9.z01
10.00MB

무료 USB 복구프로그램 (naver.com)

라기 보다는 글쓴이가 필요한 용도의 기준으로 봤을 때 장단점임.
따라서 자세한 기능의 비교라기 보다는 글쓴이의 주관적인 판단과 느낌임을 고려하셔야 함

- 비교기준
  1) 혼자 계시는 어머니를 한번씩 살펴보기 위함임
  2) 다른 형제들도 볼 수 있는 기능이 있는지
  3) 화면, 소리 전송이 잘 되는지.. (부가기능)
  4) 어느정도 오래된 스마트폰까지 지원할까? 아니면 ios도 지원하는지..

1. 알프레드
  - 꽤 오래된 스마트폰은 안됨 (확인된 버전은 킷캣 4.4.* 까지 안되는 것으로..)
  - 많이 알려지고 홍보도 많이 된 제품인데 ios도 지원되는 것 같음

2. 앳홈 (AThome)
  - 여러 개를 관리할 수 있고 카메라용앱(ATHOME video streamer)과 모니터용앱(ATHOME camera)이 따로 있음
  - 기능도 좋고 (LED도 켜고 끌 수 있음) 확장성이 좋아서 이걸로 결정할까 했으나..
  - ios 까지 지원되는 것 같은데 배터리 소모가 매우 심함 (평가에다 질문으로 올려놓기는 했는데)
    (충전기를 꽂아놨는데도 하루못가서 다 씀. 대기중에도 카메라가 계속 작동되는지 이상하게 소모가 심함) —> 패치가 된건지 지금은 그런 현상이 없음

3. 씨씨티비(SeeCiTV)
  - 사용법이 단순해서 좋음
  - 같은 구글계정으로만 볼 수 있음.
  - 무료는 1:1 만 가능한게 아쉬움 (1대 모니터, 1대 카메라)
  - 유료는 3,900원/월
  - iOS는 지원하지 않는 듯..
- 접속하면 카메라쪽 폰에서 띠링 소리가 나기 때문에 몰래 보는건 안됨

현재까지 테스트해본 제품은 이게 다네요..

From 인줄 알았는데 '졸업파티' 라는 뜻이라네요.

영화본 소감 쓰는건 처음인 듯.

 

우선 소재는 레즈비언 졸업생 때문에 졸업파티 프롬을 취소해버린 상황인데

공연계에서 찬밥신세된 네 명이 이를 이슈삼아 회자되려는 의도로 주인공을 도우려 한다는 이야기로 출발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참가하게 되는데 그 다음은 영화를 보시길..

 

결론으로 가다 보면 매우 미국적인 스토리입니다만 배경에 흐르는 내용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기존 언론을 제껴 버리는 sns 의 힘도 보여주기도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어느 장면에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를 계속 반복하는 이유가 통쾌합니다.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낙인이 좀 어이없게 해소되기는 하지만 주인공의 좌절과 용기가 흐름을 주도합니다.

 

보는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생각나는 소감은 '혐오'와 '동조'가 사람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 답게' 사는 것을 강요받아왔던 삶에서 그저 '사람답게' 살면서 보고 듣고 말하고 보여주자는 결심을 다시금 하게 됩니다.

 

이상 짧은 감상글이었습니다.

 

극중 레즈커플 노래 정말 잘해요. 게다가 메릴스트립.. 71세라는데.. 와우! 입니다. 끝.

if( sscanf("<http://a.b.c:80/abc.htm>", "%50[^:/]://%2000[^/]/%s", protocol, host, path) == 3 ) {
printf ("protocol=%s, host=%s, path=%s\n", protocol, host, path);
}

[해석]

1. 아래 string 에서
<
http://a.b.c:80/abc.htm>

2. 아래 정규식은
%50[^:/]://%2000[^/]/%s

3.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50 50개까지 허용함
[^:/] :/ 바로 앞까지..
:// 요거는 지나서
%2000 2000개까지 허용
[^/] / 바로 앞까지..
/ / 요거는 지나서
%s 그 다음 문자열..

4. 그 결과 printf 는 아래와 같이 나타남
protocol=http, host=a.b.c:80, path=abc.htm

출처는 http://mcchae.egloos.com/10685164

그동안 [^] 활용이나 방법을 잘 몰랐는데.. 공부함..

 

[C] sscanf 를 활용하여 파싱 코드를 좀 줄여보자구요~

휴우, 파이썬을 사용하다가 간만에 C 소스를 보다보니 이십년만에 C 표준 라이브러리에 있는sscanf 의 조금 더 고급스러운 기능을 사용해 보게 되네요.일단, 아래의 sccanf 를 한번 보시면,sscanf(buffer,"%50[^:/]://%2000[^/]/%s", protocol, host, path);무언가 %d, %s 등과 달리 그 뒤에 나오는 것이

mcchae.egloos.com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보면서 생각나는 것이 저들 검찰과 기득권은 '법'으로 어떻게든 똥칠을 해서 개혁을 무력화시키려고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한가지의 목표.

영화에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어빙은 유태인 역사학자 데보라 립스타트를 영국법정에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 영국법률은 재미있게도 피고소인이 명예훼손이 아닌 것을 '법'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립스타트의 변호인은 한사코 홀로코스트 피해자와 피고소인 본인도 법정 증인으로 세우지 않는 전략을 택한다.
이유는 매우 단호하고 단순하다. 어빙의 거짓말을 '법'에 타당한 증거로써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영화를 한 번 보시길 권한다. 매우 침착한 변호인과 상대방의 선동에 잘 넘어가 버리거나 감정적으로 휘둘리는 피고소인의 차이를 잘 살펴보시길..

법은 그 권위와 신뢰성이 어찌되었건 '객관적인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만약 조국 전장관 일가족의 티끌만큼의 유죄판결을 받아낸다면 조중동을 비롯한, 심지어 한경오까지 갖가지 기레기들이 떨쳐 일어날 것이란 생각이다. 논평이랍시고 자유당, 미래당, 평화당은 신나서 떠들어 제낄거고 기레기들은 검증도 없이 그냥 따라쓰겠지..
심지어 정의당까지도 한통속이 될 것 같다는 암울한 예측을 하게 된다..

지금.. 저들의 모든 법적인 시도를 무력화시켜야 검찰개혁이라는 간절한 소망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다. 공수처법이 처리되기 전까지는 우리는 아직 고담시티에 있다는 것을, 악인은 시민속에 있지 않고 권력속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4784

김복동 할머니 일대기.."절규하며 죽었다"

South Korean campaigner Kim Bok-dong has died at the age of 92
한국의 활동가 김복동 할머니가 향년 92세로 세상을 뜨셨다
The coffin passed the Japanese embassy in Seoul, accompanied on its final journey by mourners waving banners and holding yellow butterflies.
할머니의 관은 서울에 주재한 일본 대사관 앞을 지나갔으며, 이 마지막 행렬에는 많은 조문객들이 현수막과 노란 나비들을 들고 함께했다.
Cries of “Japan must apologise” rang out above the crowd, while others quietly sobbed.
“일본은 사과해야 한다”라는 울부짖음이 군중들 위로 크게 울리기도 했고 또 다른 이들은 조용히 훌쩍였다.
It was not your usual funeral procession. But then, Kim Bok-dong was not your usual woman, and this was her final act of resistance against a country which had stolen so much from her.
이것은 일반적인 장례 행렬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복동 할머니는 일반적인 여성이 아니었고 이 장례 행렬은 그녀로부터 많은 것을 훔쳐간 한 국가에 저항하는 이분의 마지막 행동이었다.
Kim was one of thousands of so-called “comfort women” rounded up by the Japanese army and forced to work as sex slaves for years on end.
김 할머니는 일본군에 의해 붙잡혀 수년간 강제 성노예로 일하게 된 수천 명의 일명 “위안부” 여성들 중 한 명이었다.
She died on Monday, at the age of 92, without ever receiving the apology she wanted; still railing against the injustice; still angry with Japan for taking the life she could and should have had.
그녀는 그토록 원했던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월요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여전히 불의에 맞서 싸우며, 그녀가 누릴 수도 있었던, 누렸어야 마땅한 자신의 삶을 낚아챈 일본에 대해 여전히 분노한 채로 말이다.
“I was born a woman,” she said, “but I never lived as a woman.”
“나는 여성으로 태어났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나는 여성으로서 살아 본 적이 없다.”

I had to comply’
‘나는 복종해야 했다’
It took Kim Bok-dong almost 40 years to find the strength to tell her story.
김복동 할머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용기를 내기까지 거의 40년의 세월이 걸렸다. She was just 14 when the Japanese soldiers arrived at her family’s home in Yangsan, South Gyeongsang. They said she was needed to work in a factory. If she did not come, they warned her mother, the family would suffer.
할머니가 고작 14세였을 때, 일본군은 경상남도 양산에 있는 할머니 가족이 살던 집에 쳐들어왔다. 그들은 할머니가 공장에서 일하는 데 필요하다고 말했다. 만일 할머니가 따라오지 않으면 가족들이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할머니의 어머니에게 경고했다.
But Kim was not taken to work in a factory. Instead, the teenager found herself transported to one of hundreds of “comfort stations” set up by the Japanese Imperial Army across the territory it had seized.
그러나 김 할머니는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징집된 것이 아니었다. 그 대신 이 십대 소녀는 일본제국 군대가 점령한 영토 전반에 걸쳐 설치된 수백 개의 “위안소” 중 한 곳으로 실려가게 되었다.

These “stations” were, in reality, brothels where some estimate as many as 200,000 women were forced to work as sex slaves.
사실 이 “위안소”들은 추정상 약 20만 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강제 성노예로 일하도록 만들어진 매춘굴이었다.
Kim, who should still have been in school, was among them.
아직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의 김 할머니는 그들 중 하나였다.
Her young age did not go unnoticed after she arrived in China.
중국에 도착한 후 그녀가 어리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When they found out I was only 14, they talked among themselves saying ‘Isn’t she too young?’,” she told YouTube channel Asian Boss during an interview in October 2018.
“내가 14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차렸을 때, 그들은 자신들끼리 말하길 ‘이 여자 아이는 너무 어리지 않나?’라고 했다”고 김 할머니는 유튜브 채널인 아시안 보스와의 인터뷰에서 2018년 10월 말했다. Apparently, it was not a problem. She was sent to start work.
그것이 문제가 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성노예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The first time, I got dragged into one of the rooms and beaten up a bit,” she recalled. “So I had to comply.”
“처음에 나는 여러 방들 중 한 방으로 끌려들어가 두드려 맞았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그래서 나는 복종해야만 했다.”
Afterwards, she said, the bed sheets were covered in blood. It was too much to bear, and she decided there was only one way out.
이후, 그녀는 말하길, 침대 시트는 피범벅이 되었다. 그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고, 그녀는 그곳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뿐이라고 믿었다.

Using the little money she had been given by her mother, she and two others convinced a cleaner to buy them a bottle of the strongest alcohol they could find.
어머니가 주신 얼마 안 되는 돈으로 그녀와 두 명의 다른 여성들은 청소부를 설득하여 구할 수 있는 가장 독한 술 한 병을 샀다.
They drank until they passed out, but it wasn’t enough. The three girls were found, and their stomachs were pumped.
그들은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셨으나 그것은 충분하지 않았다. 세 명의 소녀들은 발견된 뒤 위 세척을 받았다.
When Kim finally woke up, she made a choice – no matter what happened, she would live to tell the tale.
마침내 깨어났을 때 김 할머니는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 이 이야기를 알려야겠다고.
‘How could I tell anyone?’
“어떻게 남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The Japanese Imperial Army first introduced the idea of “comfort stations” in the early 1930s. It was supposed to stop their soldiers going on “raping sprees”, and keep them free of sexually transmitted diseases
제국주의 일본군은 1930년대 초 “위안소”의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이는 일본군이 “무분별하게 강간하는 것”을 방지하고 성병을 옮기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In the beginning, it is thought they used prostitutes. But as Japan’s military grew, so did demand. Eventually, they turned to slavery.

초기에 일본군은 창녀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 군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수요도 늘었다. 결국 그들은 노예를 찾고자 했다.
The men, Kim Bok-dong later recalled, would line up outside, waiting their turn.
후에 김복동 할머니는 남자들이 밖에서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고 기억했다.
Weekends were particularly dreadful. On Saturdays, she would work for six hours, the men arriving one after the other. On Sundays, it was nine hours.
특히 주말은 끔찍했다. 토요일이면 김복동 할머니는 6시간을 일해야 했고 남자들은 쉬지 않고 들어왔다. 일요일에는 9시간이었다.
Sometimes she would see almost 50 men in a day. Some days, she lost count. By the time her “shift” ended, she could barely stand up or walk.
어느 때는 하루에 거의 50명 가량을 상대해야 했다. 어느 날은 수를 세다가 잊어버리기도 했다. 하루의 “근무시간”이 끝날 때면 할머니는 거의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했다.
Kim was moved from station to station, and in 1945 she found herself in Singapore. The Japanese began to move Kim and the other comfort women out of the brothels. Kim found herself working as a nurse, still waiting for rescue.
김 할머니는 여러 위안소를 전전했고 1945년에는 싱가포르에 있었다. 일본군은 김 할머니와 다른 위안부 여성들을 위안소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김 할머니는 간호사로 일하며 구조되기를 기다렸다.

After first telling her story in 1992, she became a dedicated justice campaigner
1992년 처음 자신의 이야기를 한 후로 김 할머니는 열성적인 정의 활동가가 되었다.
It was 1947 when she was finally brought home to South Korea. She didn’t know how long she had been gone; she also didn’t know how to find the words to explain what had happened to her.
김복동 할머니가 마침내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1947년이었다. 김 할머니는 자신이 얼마 동안 떠나 있었는지 알지 못했고 또한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How could I have told them about my experiences?” she asked. “I had things done to me that were unfathomable.”
그녀는 “내가 경험한 것들을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나?”라고 물으며,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많은 일을 겪었다”고 말했다.
She wasn’t alone in her silence, as the University of Connecticut’s Alexis Dudden explains.
커네티컷 대학의 알렉시스 더든 교수가 설명하듯 할머니는 침묵을 지켰던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다.
“I think her history following her return to Korea is a really good explanation of the double victimization of those who survived,” the history professor said. “There was not space in this society for the women to go public.”
더든 역사학 교수는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 할머니에게 있었던 일은 생존한 위안부들이 겪어야 했던 이중 희생화의 좋은 설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이 사회에서 그 여성들이 대중 앞에 나설 곳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Kim did find her voice though, a few years after her return. Her mother wanted her to marry, and she felt she had to explain why she would not.
하지만 김복동 할머니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귀국한 후 몇 년이 지나서였다. 어머니는 그녀가 결혼하기를 원했고, 할머니는 자신이 왜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하는지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I confessed that, given all the abuse done to my body, I didn’t want to screw up another man’s life,” she told Asian Boss.
김복동 할머니는 “내 몸에 가해진 온갖 학대를 생각하면 다른 남자의 인생을 꼬이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다”고 아시안 보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Her mother, she said, became distressed. Unable to share her daughter’s secret, she died shortly afterwards of a heart attack. Kim believed it was the pain of the secret which killed her.
김복동 할머니는 어머니가 많이 괴로워했다고 말했다. 딸의 비밀을 감당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김 할머니는 어머니를 죽인 것은 바로 그 비밀의 고통이었다고 믿었다.

‘It’s not about money’
“돈이 문제가 아니다”

It would take decades for Kim Bok-dong to talk again about what happened to her. She moved to Busan, where she ran a successful fish restaurant.
김복동 할머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기 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김 할머니는 부산으로 옮겨가 생선 음식점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And then Kim Hak-sun came forward, sharing her own story of being imprisoned as a “comfort woman” by the Japanese in China – the first South Korean victim to break her silence so publicly. It was 1991. By March 1992, Kim Bok-dong had come forward to tell the world her account.
그러던 중 김학선 할머니가 중국에서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로 붙잡혀 있었던 본인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말했다. 김학선 할머니는 침묵을 깨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최초의 한국인 피해자였다. 그게 1991년이었다. 1992년 3월, 김복동 할머니는 앞으로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다.
“She had incredible strength – she was a survivor,” says Prof Dudden, who first met her more than two decades ago. “She came forward to tell her truth. That is when she makes her mark on the page.”
20여 년 전 김복동 할머니를 처음 만난 더든 교수는 “김 할머니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생존자였다”며, “김 할머니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 때가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Her story would not just impact her fellow survivors in South Korea, though. It would bring together survivors from around the world – including women in Vietnam who had been attacked by South Korean soldiers during the US war. In 2014, she set up The Butterfly Fund to support fellow victims.
하지만 할머니의 이야기가 한국에 있는 동료 생존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 각지의 생존자들을 결집하게 했으며 그 중에는 미국과의 전쟁 중에 한국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던 베트남 여성들도 포함되었다. 2014년 김복동 할머니는 동료 희생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나비재단을 설립했다.
“The survivors of sexual violence in conflict from the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and Uganda, address Kim Bok-dong… as ‘our hero’, ‘our mama’, and ‘our hope’,” a spokesman for The Korean Council for Justice and Remembrance for the Issues of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recalls.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대변인은 “콩고민주공화국과 우간다에서 분쟁 중 성폭력을 당한 피해생존자들은 김복동 할머니를… ‘우리의 영웅’, ‘우리의 엄마’, ‘우리의 희망’이라고 부른다”고 회상한다.

Kim did not just share her story. When she had money, she gave it. In 2015, she started a scholarship for children in conflict regions with her own money. The fact her own education had been cut so short was a regret until the end of her life. When it became clear she was dying of cancer in 2018, she began to give away what little money remained.
김복동 할머니는 단순히 자신의 이야기를 알린 것만은 아니었다. 김 할머니는 돈이 있으면 이를 나누었다. 2015년 김 할머니는 자신의 돈으로 분쟁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장학금 지급을 시작했다. 이른 나이에 교육을 중단한 것이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할머니에게 후회로 남았다. 2018년 암으로 죽을 것이 확실해지자, 할머니는 남아 있는 약간의 돈마저도 기부하기 시작했다.
But through all this – speaking around the world, campaigning outside the Japanese embassy every Wednesday – she still did not get the apology she felt she and the other victims deserved.
그러나 이런 모든 일들, 즉 전세계에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캠페인을 벌이는 모든 행동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자신과 다른 희생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사과를 아직 받아내지 못했다.
She was derisive of the 2015 deal between the Japanese and South Korea, which saw her former captors pay 1bn yen ($8.3m, £5.6m) to fund victims.
김 할머니는 자신의 납치범들이 피해자들에게 10억 엔(830만 달러, 560만 유로)을 지불하도록 한 2015년 한일 협정을 비웃었다.
What Kim wanted – what she was fighting for – was a full admission of guilt. Some still allege the women were not forced to work in the stations.
김복동 할머니가 원했던 것, 할머니가 이제껏 싸워온 것은 상대가 죄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 여성들이 매춘소에서 일하도록 강요 받은 것이 아니라고 아직도 주장한다.
“We won’t accept it even if Japan gives 10bn yen. It’s not about money. They’re still saying we went there because we wanted to,” Kim told lawmakers in 2016.
2016년 김복동 할머니는 국회의원들에게 “우리는 일본이 100억 엔을 준다 해도 받지 않을 것이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그곳에 가고 싶어해서 갔다고 아직도 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South Korea’s President Moon Jae-In has since said he will renegotiate the fund, focusing more on the victims.
문재인대통령은 그 이후 희생자들을 보다 초점을 맞춰 그 기금을 재협상할 것이라고 밝혔다.
But it came too late for Kim. As she lay taking her final breaths, she expressed “strong anger” towards Japan, her friend Yoon Mee-Hyang told reporters. As Prof Dudden puts it, she “died screaming”.
그러나 김복동 할머니에게는 너무 늦었다. 윤미향 씨는 기자들에게 할머니는 병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며 일본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현했다고 말했다. 더빈 교수의 말처럼 김복동 할머니는 “절규하며 죽었다.”
But her legacy will not be lost. In among the crowd at her funeral was Kim Sam, 27, who first met Kim “sitting up straight even in the rain as she spoke about her struggle”.
하지만 김복동 할머니의 유산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장례식에 참석한 군중들 중에 27세의 김삼 씨는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할머님은 투쟁에 대해 말할 때 빗속에서조차도 자세를 똑바로 하고 앉으셨다”고 말했다. “Upright, dignified – that’s how she always was, first as a victim and later as a human rights activist,” she recalled.
“고결하고 품위 있게, 김복동 할머님은 늘 그러셨다. 처음에는 희생자로서, 나중에는 인권운동가로서”라고 그녀는 회상했다.

“She’s a role model I respect the most.”
“할머님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롤모델이시다.”

(뉴스프로의 번역입니다)​